Lecture scripts (한글 강의록)/은혜가 더 크다

Grace is greater Ch.2.

코필아카데미 2024. 11. 23. 19:23

 Grace Is Greater (은혜가 더 크다) by Kyle Idleman


           당신의 마음의 상함보다 더 아름다운 은혜
           Ch.2 More Beautiful Than Your Brokenness
             
 하나님의 은혜는 당신의 마음의 상처를 능히 고치고도 남는다는 의미의 제목이겠지요. 모든 문장을 번역하기보다 글의 흐름을 알 수 있는 범위에서 요약해서 번역하고저 합니다. 그것이 독자가 읽기에도 편할 것 같습니다. 번역되어 출판된 “은혜가 더 크다” (유정희 역, 규장출판사)가 있으므로 독자가 그것을 이용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장에서 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신선하게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마리아 여인의 구원과 변화에 대한 해석을 하고 설교를 많이 합니다만
아이들맨 목사가 자기 삼촌의 경우를 공개하면서 사마리아 여인과 비교함으로써 사마리아 여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에도 똑같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마음에 있는 깊은 상처를 오랫동안 묻어두고 남이 알까 봐 거리를 두고 사람을 피하고 살아가던 사람을 예수님이 찾아가 만나주시고 그 마음의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하나님 앞에 그것을 솔직하게 내어놓게 함으로써 그가 변한 모습은 아름다울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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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맨 목사가 주관하는 모임에서 한 나이든 사람이 (그의 삼촌이었다) 과거에 어느 여성과의 관계를 통해서 임신이 되고 아이가 출생했을 때 부득불 누구에게 입양할 수 밖에 없었던 고백, 그리고 그가 다른 여인과 결혼하여 딸을 낳고 아내와 살아가면서도 늘 죄책감에서 살아왔던 고백을 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딸이 아버지와 만나 아버지를 용서하노라고 말하고 하나님도 그러셨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그 남자의 삶을 변화시켰고 자유감과 치유를 얻었습니다.

 이 모임에 참석해서 이 말을 들은 Wes 라는 남자는 어느 날 자기 아내와 침대에 누워 잠들려고 할 때 아이들맨 목사의 모임의 실황을 보고 있던 아내가 남편 Wes 에게 저 아이들맨 목사가 남편 Wes 의 사촌이라고 말해주는데 그녀는 남편의 진짜 부모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던 터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고백하는 사람이 아이들맨 목사의  삼촌이고 그 고백하는 나이든 남자가 Wes 의 생부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 Wes 가 아이들맨 목사의 페이스북에 편지를 올립니다. 자기와 아이들맨 목사가 사촌간이라고. 그는 그 생부의 가정에 동요를 주지 않으려고 그냥 지내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냥 지내는 것을 허용치 않는 것으로 느껴져서 글을 올린다고 했습니다.

 그제서야 아이들맨 목사는 어려서부터 가까이 지낸 삼촌이지만 무언가 무거운 짐을 진 사람처럼 사는 것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My uncle Dave somehow missed grace when his girlfriend became pregnant. He shouldn’t have missed it. He grew up in a church environment and his girlfriend’s father was a pastor. He shouldn’t have missed grace, but somehow it didn’t get communicated. Carrying around the guilt and shame of a secret for decades takes a toll on a man’s heart.

아이들맨 목사가 볼 때 그의 삼촌 Dave 는 자기의 걸 후렌드가 임신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놓친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장했고 그 걸 후렌드는 목사의 딸이었으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고 죄책감과 수치심을 안고 수십 년을 살아온 것입니다.

When the secret about my uncle Dave’s son came out, it was overwhelming for him. For decades he had lived with the weight of it and the fear of people finding out. What would my dad, his older brother, say? How would his parents, my grandparents, respond? Would they feel cheated out of knowing their grandchild? And what about his daughter, my cousin? She had grown up as an only child. She had always wanted a brother. But he never told her. He never told anyone.

이제와서 삼촌 Dave 는 그의 아들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고 그는 당황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우리 할아버지는 어떻게 보실까? 아이들맨의 아버지인 Dave의 형은 어떻게 생각할까? 자기들을 속였다고 분개하지는 않을까? 자기의 딸은 이복 오빠인 Wes 의 존재를 알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기 아들 Wes 는 또 어떤 태도를 보일까? 자기를 버렸다고 느낄텐데 . . .


 Sometimes our sin stays hidden because we are in denial or because our pride has blinded us to it. But oftentimes we try to keep our sin a secret because we just can’t deal with what we’ve done. So we do our best not to think about the mistakes we’ve made or the sins we’ve committed, and we try to steer clear of God. How could he possibly forgive us when we can’t even forgive ourselves?

때때로 우리의 죄는 숨은 채로 있는다. 우리가 부인하기 때문에 또는 우리의 자부심이 그것에 눈을 감게 하기 때문이다. 종종 우리는 우리의 죄를 비밀로 남겨두고저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일을 다룰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든 잘못들에 대하여 생각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 한다. 그리고 하나님도 피하고 싶어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한다.

Sometimes when our secret sin gets exposed and we can no longer hide it, then we go into hiding. As much as possible, we do our best to avoid the people who know. Shame becomes our constant companion who relentlessly whispers, You’re not worthy of forgiveness. You don’t deserve a second chance.

종종 우리의 비밀한 죄가 드러나게 될 때 또 우리가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때 우리가 숨어버린다. 내 비밀한 죄를 아는 사람을 피하기 위해 가능한한 최선을 다한다. 수치심이 누구러지지 않고 내게 끊임없이 속삭이는 동료가 된다. “너는 용서받을 가치가 없어. 너는 두 번째 기회를 받을 자격이 안 돼” 라고.

But here’s a surprising characteristic about grace – grace chases you. You can run away and hide, but grace is relentless. Grace will chase you down. That’s what’s happening to some of you right now, and you don’t even know it. With every word you read, grace is gaining ground.

그러나 여기에 은혜에 대한 놀라운 특징이 있다. 은혜는 당신을 추적한다. 당신은 도망치고 숨을 수 있으나 은혜는 끈질기다. 은혜가 당신을 끝까지 따라간다. 당신은 그 사실조차 모른다. 당신이 읽는 모든 언어와 더불어 은혜는 더욱 강력해진다.

 

 As a pastor, I love witnessing the moment grace finally catches up to someone’s mess. The phrase I use to describe that moment is “beautiful collision.” Those two words don’t seem to go together. Collision brings to mind words like broken, busted, and wrecked – not typically words that fit with beautiful. But the Gospels are full of beautiful collisons. When a broken, busted, and wrecked life collides with Jesus, it’s a beautiful thing.
목사로서 나는 (Idleman) 은혜가 마침내는 어느 사람의 혼돈을 따라잡는 그 순간을 증거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그 순간을 “아름다운 충돌”이라고 표현한다. 그 두 단어 (beautiful; collision)는 조화되지 않는 듯 보인다. 충돌은 “깨어진, 고장이 난, 만신창이가 된”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아름다운 이란 단어와 맞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복음서들은 아름다운 충돌들로 가득하다. 깨어지고, 고장이 안고, 만신창이 된 인생이 예수와 충돌할 때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 된다.     

 

                
                 은혜와 함께 하는 단기 집중적인 과정
                       Crash Course with Grace

In John 4 we find ourselves at an intersection where a beautiful collision will soon take place. Jesus is traveling on his way to another city. John tells us in John 4:4 that “he had to go through Samaria.” That seems like a strange way to put it. At the time, Jews would go out of their way to not go through Samaria. They would typically go around it and try to steer clear of any Samaritans. There was a lot of prejudice and hatred between the Jews and the Samaritans. They tried hard to have nothing to do with each other, to the point that if a first-century Jewish person read this, he would think John was making the point that Jesus had to go through Samaria because he had no other choice. Maybe a road was closed or traffic was backed up from so many people going around Samaria that he had to go through it.

요한복음 4장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충돌이 곧 일어날 교차로에 서 있음을 발견한다. 4:4 에 보면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경유하여 가야만 했다”는 기록을 본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지 않으려고 다른 길로 가곤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피하려고 그런 것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많은 편견과 증오가 있었다. 서로 관련을 맺지 않으려고 무진 노력했다. 요한의 표현방식은 1세기의 유대인이 읽으면 길이 막혔거나 교통이 꽉 막혀서 할 수 없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만 했던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Had to go” seems to be used more in the sense that he had an appointment he had to keep. Like he looked on the calendar that was established before the creation of the world and saw he was supposed to be at a specific place at a specific time to meet a specific person. There was going to be a beautiful collision and God had it circled on his calendar. Grace chased this woman down and caught up with her at a well outside of town.

“가야만 했다” (had to go)란 표현은 중요하다. 이 표현은 예수께서 자기 의지와는 다르게 가고 계셨음을 분명히 표현한다. 그분은 그렇게 가게 강요를 받고 계셨다.  마치 누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길을 택해야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창조 이전에 설치된 달력을 바라보듯이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사람을 만나게 되어있는 것을 아셨다. 아름다운 충돌이 있을 예정이고 하나님이 그 달력 위 그 날자에 동그라미를 그리셨다. 은혜가 이 여인을 추적했고 동네 밖 우물에서 그녀를 따라잡았다.

Jesus had to go to Samaria. He arrives around noon, in the heat of the day. He comes to the well and sits down to rest while his disciples go into town and get some food. It’s an unusual time and place to meet someone. People would come to the well in the morning hours or in the late evening, not at noon when the sun was beating down. But then he sees the person he is waiting on. A woman arrives at the well to get some water. It was an unusual time for such a chore, but it was also uncommon that she was alone. In those days women would go to the well together.

예수께서는 정오 무렵, 그 뜨거운 시간에 거기에 도착하신다. 제자들이 음식을 사러 동네에 들어간 동안 그분은 우물가에 앉아 쉬신다. 사람들은 아침이나 늦은 저녁에 우물가에 오곤한다. 태양이 뜨겁기 때문이다. 그때 그분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보신다. 한 여인이 물을 뜨러 그 우물에 온 것이다. 이 뜨거운 시간에 물 뜨는 일은 귀챦은 일이므로 그것은 보통의 일은 아니고 여자가 혼자 온 것도 통상적인 일이 아니다. 여인들은 우물에 여럿이 다녔기 때문이다.

What we soon discover is that this woman has rough past and a bad reputation. It’s hard to say if the reason she’s alone is because she avoided people or they avoided her. She had grown tired of the judgmental looks and the whispers behind her back. So she went by herself, with only her shame and rejection to keep her company.

이 여인은 쓰라린 과거와 나쁜 평판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곧 우리는 알게 된다. 그녀가 사람을 피하기 때문인지 그들이 그녀를 피했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자기를 판단하는 시선들과 그녀 뒤에서 속삭이는말들에 지쳤다. 그래서 그녀의 수치감과 배척감만을 친구로 삼아 혼자 온 것이다.

When she arrives, Jesus asks for a drink, and she’s not sure how to respond. She’s taken aback that he, a Jewish man, would speak to her, a Samaritan woman, and she calls him on it.

그녀가 왔을 때 예수께서는 마실 문을 청하셨다. 그녀는 어떻게 대답할지 몰랐다. 유대인인 그가 사마리아인인 자기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에 깜짝 놀라서 그분의 말에 대응했다.

“You are a Jew and I am a Samaritan woman. How can you ask me for a drink?” ...  Jesus answered her, “If you knew     the gift of God and who it is that asks you for a drink, you would have asked him and he would have given you living     water.” (vv.9-10)

“당신은 유대인이고 나는 사마리아 여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게 물을 청합니까?” ... 예수께서 그녀에게 대답하셨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선물과 물 한 모금을 청하는 그가 누구인지를 알았다면 오히려 나에게 구했을 것이고 나는 당신에게 생명수를 주었을 것이오.”

Now she’s really confused. She’s thinking in terms of physical water for her physical thirst, so she points out that Jesus doesn’t even have a bucket to draw water with. And Jesus explains to her that he is the living water, and that if she drinks this water she’ll never thirst again.

그녀는 이제 정말 혼란스러웠다. 육체의 갈증을 위한 우물의 물에 비추어 생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예수께서 물을 길을 두레박조차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기가 생수이고 그녀가 이 생수를 마신다면 다시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She’s still not exploring the metaphor. He’s not making sense to her. So Jesus decides to be a little more direct with her.

그녀는 여전히 그 은유를 살펴보고 있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그런 의미로 말씀하고 있지 않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녀와 좀 더 직접적이 되시려고 작정하신다.

He told her, “Go, call your husband and come back.” “I have no husband,” she replied.
Jesus said to her, “You are right when you say you have no husband. The fact is, you have had five husbands, and  the man you now have is not your husband. What you have  just said is quite true.” (vv.16-18)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당신의 남편을 불러 데려오시오.” 그녀가 대답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그 말이 맞소. 사실인즉 당신은 다섯 남편들이 있었는데 지금 사는 남편도 당신 남편이 아니지요. 그러니 당신이 방금 말한 것이 아주 맞는 말이오.” (4:16-18)

Well, that’s uncomfortable. I think at this point she might be ready to go back to talking in metaphors. Jesus doesn’t step away from the truth. He describes the reality of what she’s done and the mess that her life has become. The well of relationships that she keeps drawing from isn’t quenching her thirst, and Jesus isn’t going to politely pretend that everything is OK when he knows that everything is not OK. If she’s going to receive his grace, she needs to stop hiding in her sin.

참 그 말은 불편한 말이다. 이 시점에서 그녀는 은유로 돌아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현실로 말하자니 자기가 불편하니까). 예수께서는 진실로부터 물러서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녀가 한 일, 그녀의 삶이 혼돈에 빠진 그 현실을 묘사하신다. 그녀가 계속 퍼내고 있는 관계의 우물은 그녀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예수께서는 그녀의 만사가 잘 되고 있지 않은 것을 아실 때 만사가 괜챦다는 듯이 예의바르게 가장하고 계시지 않으셨다. 만일 그녀가 그분의 은혜를 받으려고 한다면 그녀는 자기의 죄를 숨기기를 중단할 필요가 있다.
 

This is hard, and I know we want to find another way, but here’s the truth: before we collide with the grace of God, we must collide with the truth of our own sin. I wonder what hard truth Jesus would say to you and to me. Maybe he would say:

이는 어려운 일이고 나는 우리가 다른 방도를 찾기 원하지만 여기에 진리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충돌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의 사실과 충돌해야 한다. 나는 얼마나 어려운 사실을 예수께서 나와 당신에게 말씀하실 것인지 궁금하다. 아마 그분은 이런 말들을 하실 것이다.

 

Your short temper keeps everyone around you on edge, and bitterness toward you is growing in your family.
Your drinking has gotten out of control. It’s affecting a lot  more people than just you.
Your porn problem is killing any chance of intimacy you have in your marriage.
Your flirting is leading you down a path that will devastate your family.
You’re allowing your heart to fall for a girl who’s causing you to fall away from me.
You’re choosing your live-in boyfriend over your relation-ship with me.

It’s going to have to be one or the other.
You’re going deeper into debt to feel better about yourself, but the water out of that well isn’t going to satisfy you.
Your self-righteous and legalistic spirit is causing the people at your job to stay away from me.
Your judgmental attitude and your harsh tone are costing you a relationship with your grandkids.

   * 너의 성급한 성질이 모든 사람을 네 주변으로 몰아낸다. 그리고 너를 향한 비통함이 네 가정 안에서 자라고 있다.
   * 너의 음주는 통제를 벗어났다. 그것은 너만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지고 있다.
   * 너의 포르노 문제는 네 결혼 생활에서 갖는 친밀함의 기회를 죽이고 있다.
   * 너의 바람피우는 것은 (flirting) 너의 가정을 황폐케 할 길로 너를 이끌어가고 있다.
   * 너는 한 소녀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데 그 소녀는 너로 하여금 나 예수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만들고 있다.
   * 너는 나 예수와의 관계 위에다 너의 동거 남자친구를 두기를 선택하고 있다. 너의 남자친구든 나 예수든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할 예정에 있지.
   * 너는 너 자신에 대해 더 좋게 느끼기 위하여 부채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우물에서 나오는 물은 너를 만 

     족시키려 하고 있지 않다.
   * 너의 자기의적(自己義)이고 율법적인 정신은 너의 직장에 있는 사람들이 네게서 떠나 있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
   * 너의 판단적인 태도와 거친 음성은 너의 손자 손녀들과의 관계를 희생시키고 있다.

Jesus speaks some difficult truths. It’s the part of the collision with grace that we do our best to avoid. And like any of us would do, the woman at the well tries to steer the conversation away from her sin and shame.

예수께서는 몇 가지 어려운 진리들을 말씀하신다. 우리가 피하려고 최선을 다 하는 것은 은혜와의 충돌의 그 부분이다. 우리 중 어떤 이가 그러하듯이 우물가의 그 여인은 자기의 죄와 수치로부터 피하는 대화를 하려고 애쓰고 있다.

 “Sir,” the woman said, “I can see that you are a prophet. Our ancestors worshiped on this mountain, but you Jews       claim that the place where we must worship is in Jerusalem.”  (vv.19-20)

“선생님, 저는 당신이 선지자인 것을 알 수 있어요. 우리 조상들은 이 산 위에서 예배했으나 당신들 유대인들은 우리가 예배해야 하는 장소가 예루살렘에 있다고 주장하네요.” 그녀가 말했다. (4:19-20)

                            거짓된 추정들
                         False Assumptions

Let’s push pause on our story and talk about some false assumptions that can cause us to miss his grace in our own lives.

우리 이야기를 잠간 중단하고 우리로 우리의 삶 속에서 그분의 은혜를 잃게 만드는 거짓된 추정들에 대해 말해보자.

Assumption #1: Jesus wants nothing to do with me.  

If your assumption about Jesus is that he doesn’t have any interest in you, then there’s a good chance you’ve never had much interest in him. Said another way, it’s not that you don’t want grace. Who wouldn’t want grace? It’s that you’re convinced grace doesn’t want you.  

추정 1: 예수님은 나와 관계 맺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만일 당신의 예수님에 대한 추정이 그분이 당신에게 흥미를 갖지 않으신다는 것이라면 당신이 그분에게 많은 흥미를 갖지 않은 좋은 기회가 있다. 달리 말한다면  당신이 은혜를 원치 않는다는 그것은 아니다. 누가 은혜를 원하지 않을 것인가?  당신은 은혜가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는다는 것이다. 
 Said another way, it’s not that you don’t want grace. Who wouldn’t want grace? It’s that you’re convinced grace doesn’t want you.

Feeling rejected can be one of the worst feelings to experience. When someone experiences rejection early and often, they quickly learn to build up walls to keep people from getting close. Given this woman’s history of husbands, she was likely careful to avoid putting herself in a position of vulnerability. After all, you don’t run the risk of rejection if you never give someone a chance to hurt you.

배척당한다는 느낌은 경험하는 죄악의 느낌들 중 하나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어린 나이에 자주 배척을 경험할 때 그들은 사람들을 가까이 두지 않으려고 벽을 쌓기를 재빨리 배운다.  이 여인의 남편들과의 편력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을 상처받기 쉬운 자리에 두기를 피하려고 조심한 듯했다. 결국 당신은 당신에게 상처를 주는 기회를 어떤 사람에게 결코 주지 않으면 배척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
 After all, you don’t run the risk of rejection if you never give someone a chance to hurt you.

 

But Jesus went out of his way to be with this woman. Grace chased her down because that’s what grace does.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여인과 함께 있기 위하여 그의 길을 벗어나셨다. 그것이 은혜가 하는 바이기 때문에 은혜는 그녀를 추적했다.

After preaching at one of our Sunday-night services, I was standing down front as we worshiped. A man came to talk to me. I could tell he had been crying and was still a little emotional. He told me his name, and I asked how I could pray for him.

주일밤 예배들 중 하나에서 설교를 마친 후 나는 우리가 예배할 때 입구에 서 있었다. 한 남자가 내게 말하려고 왔다. 그는 울고 있었고 아직 좀 기분이 들떠 있었다. 그는 내게 자기 이름을 말하고 나는 그를 위해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He cried his way through his answer. “Well, my wife has left me. It’s my fault. I’ve done some really stupid things. I haven’t treated her the way she deserves. She tried to tell me but I just wouldn’t listen. Would you pray that God would forgive me and my wife would forgive me? I know I’m ready to make some changes, but I’m not sure that God would want me here after the mess I’ve made of things.”

그는 울부짖는 소리로 대답했다. “후우, 제 아내가 나를 떠났어요. 제 잘못 때문입니다. 저는 몇 가지 정말 어리석은 짓들을 했습니다. 저는 아내가 받아야할 합당한 식으로 대우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내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그저 들으려 하지 않았죠. 하나님이 저를 용서하시고 내 아내가 나를 용서하게 기도해주시렵니까?  나는 몇 가지 변화를 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이 내가 어떤 일들로 만든 혼란 후 여기에서 나를 원하시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He was assuming that his mistakes were greater than God’s grace and that Jesus wouldn’t want anything to do with him. I prayed for him and asked God to intervene in his marriage. I prayed that God would draw him and his wife back together again. I asked God to fight for him and for his marriage. But more than anything, I prayed for his relationship with Jesus, that he would know it wasn’t an accident he was in church and that God wasn’t rejecting him but was ready to help him.

그는 자기의 잘못들이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크다고 추정하고 있었고 예수님이 자기와 어떤 관련을 맺기를 원치 않으실 거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위해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그의 결혼생활에 개입하시기를 구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를 잡아당기고 그의 아내를 다시 돌아와서 함께 하도록 구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결혼생활을 위해 싸우시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나는 예수님과 그의 관계를 위해 기도했고 그가 교회에 온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을 알기를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그를 배척하지 않고 그를 도울 준비가 되어있는 것을 그가 알기를 기도했다.

 

 After I prayed I asked him if this was where he went to church. He explained, or rather confessed, that he hadn’t been to church since he was a kid. I said, “Oh, does your wife go here?” He explained that she didn’t go to church either. Then I asked him what made him come and he said, “I don’t know. I was driving by and just felt like I had to go.”

내가 기도한 후에 나는 그에게 이곳이 그가 예배하려고 온 곳이냐고 물었다. 그는 다소 고백하듯이 설명했다. 그는 아이시절 이후로 교회에 다닌 적이 없었다고. 나는 말했다. “오, 당신 아내는 여기에 옵니까?” 그는 아내도 또한 교회 다니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이 그로 여기 오게했는지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저는 모릅니다. 저는 무엇에 몰리고 있었고 나는 가야만 한다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he said, “I don’t know. I was driving by and just felt like I had to go.”

I think I understood what he meant. I connected him to a man who presented the gospel to him, prayed with him, and got some information from him so we could follow up.

나는 그가 의미하는 뜻을 이해했다. 나는 그를 그에게 복음을 제시한 사람에게 연결해주었고 그를 위해 기도했고 우리가 계속 후속 조치를 하게 그로부터 몇 가지 정보를 얻었다.

 

On Sunday morning, the very next day, I had finished with my message and was standing down front as the service was wrapping up. Two ladies came down to talk with me. It turns out they were sisters. One sister was comforting the other, who was clearly going through something difficult.

바로 그 다음 날인 주일 아침에 나는 설교를 마치고 단에서 내려와 예배가 마감되려는 때 입구에 서있었다. 두 숙녀들이 내게 말하려고 다가왔다. 그들은 자매들 사이였다. 한 자매가 다른 쪽을 위로하고 있었는데  그 자매는 분명 어려운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 중이었다.

Before I had a chance to ask for her name or why she had come down, she explained, “I haven’t been to church in a long time. I hope it’s OK that I’m here. Last night I was so upset and my sister said I had to come this morning.”
She asked me to pray for her husband, because they had recently separated. She asked if I would pray that God would soften his heart, because she didn’t think he cared anymore.

그녀의 이름을 묻거나 왜 내게 왔는지 묻는 기회를 갖기 전에 그녀가 설명했다. “저는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지 않고 지냈죠. 저는 제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기를 바랍니다. 지난 밤 저는 제법 흥분이 됐고 내 자매는 오늘 아침 이 교회에 와야만 한다고 말했죠.”
그녀는 자기 남편을 위해 기도하기를 요청했는데 그들은 최근에 갈라섰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게 하나님이 남편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게 기도하기를 요청했는데 이유인즉 남편이 더 이상 돌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At the point my heart was pounding. I said to her, “I didn’t get a chance to get your name. Can you tell me your name?”

그 시점에서 내 마음은 쿵쿵 뛰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 이름을 들을 기회를 못 가졌군요. 당신 이름을 말해주시렵니까?”

Do you ever get the feelings that God kind of winks at you?
I excitedly told her that her husband had come forward in tears just the night before. He had repented and asked God for help. I could tell she was having a hard time believing it. It was a beautiful collision, and grace was flying everywhere.

당신은 하나님이 어느 정도 당신에게 윙크하신다고 그런 느낌들을 가진 적이 있는가?  

나는 흥분해서 그녀에게 그녀의 남편이 바로 전날 밤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 나아왔다고  말했다.  남편이 회개했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했다고. 그 여인은 그것을 믿기에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나는 말해야겠다. 그것은 아름다운 충돌이었고 은혜가 도처에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Both of them were making the assumption that God had given up on them and it was too late. They presumed that their marriage was too much of a mess, and he wouldn’t want to have anything to do with it. But God made it clear that he was ready to meet them right where they were.

두 사람 모두 다 하나님이 그들을 포기하셨고 이제는 너무 늦었다고 추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결혼생활이 너무 혼란스럽답고 추정했고 그 남편은 그 혼란과 어떠 연관도 맺기를 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들을 만나주실 준비를 하고 계셨다.

   

 Assumption #2: Jesus is more interested in religion than me.
 Did you notice what the woman at the well does in the conversation? She tries to distract Jesus by talking about religion. She tries to avoid this collision by engaging him in some religious argument that could be debated endlessly. These days grace often gets overlooked because the church gets caught up in religious arguments and interpretive differences.

추정 2: 예수님은 나보다 종교에 더 관심을 두신다.
당신은 우물가의 여인이 대화 중에 하는 행동을 눈여겨 보았는가? 그녀는 종교 얘기로써 예수님을 대화 속에 다른 데로 끌어가려고 애셨다. 그녀는 예수님을 끝없이 논의될 수 있는 몇 가지 종교적 논쟁에 관여케 함으로써 이 충돌을 피하려고 애썼다. 이 시대에 은혜는 자주 간과되었는데 이유는 교회가 종교적인 논쟁들과 해석상의 차이점들에 말려들었기 때문이다.


 I’m amazed at how easy it is for us to become distracted with religious or even pseudoreligious arguments. I think we are especially prone to this when what we are studying gets a little uncomfortable.

나는 우리가  종교적이거나 사이비 종교적인 논쟁들로 정로에서 이탈하게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알고 경악한다. 우리는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것이 다소 불편하게 될 때 특별히 이런 경향으로 기우러진다고 생각한다. 

 
 Like the woman at the well, we have a tendency to get religious when Jesus starts to get a little too personal. I run into this as a preacher so often that I’ve developed a bit of a theory about it. The more people obsess over issues that clearly fall under the umbrella of theological interpretation or opinion, the more likely it is they’re trying to keep Jesus from getting too personal in some area of their lives.

우물가의 이 여인처럼 우리는 예수께서 다소 너무 개인적이 되기 시작할 때 종교적인 되는 경향을 가진다. 나는 설교자로서 그리 자주 이런 것에 뛰어들어서 그것에 관한 이론 얼마를 발전시켜왔다. 사람들이 신학적 해석이나 견해의 우산 아래 분명히 떨어질 문제들에 사로잡힐수록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삶의 어떤 영역에서 너무 개인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듯하다.

 

I used to get distracted by this quite a bit. Someone would email me and go off on some interpretative detail they felt like I missed, and I’d fire off an email and defend my interpretation, and we’d go back and forth. I don’t do this much these days. I’m not saying I never do it. If you want to try it, you’re welcome to, but I rarely come out to play anymore. I’ve learned that when someone is especially determined to talk about religion, it’s often because they are desperately trying to keep Jesus from getting too personal.

어떤 사람은 내게 이메일을 보내고 내가 잘못했다고 그들이 느끼는 어떤 해석상의 세밀한 것에 버럭 화를 낸다.  나는 해명하는 이메일을 보내고 내 해석을 변명한다. 이렇게 이메일이 오고간다. 요즘 나는 이런 것을 많이 하지 않는다. 결코 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당신이 그러기를 시도한다면 환영한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런 것을 하기 위해 잘 나서지 않는다.  나는 배웠다. 사람이 특별히 종교에 대하여 말하려고 작정할 때 그 이유는 예수님이 너무 개인적으로 오시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극렬하게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The Samaritan woman falsely assumes Jesus will be more interested in religion than her, so she tries to draw Jesus into a religious debate.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께서 그녀보다는 종교에 더 흥미를 가질 것이라고 사실과 다르게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을 종교적인 논쟁 속으로 끌어당기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Assumption #3: He’s making an offer that’s too good to be true.
This woman doesn’t believe in water that will forever quench her thirst. Again, consider her history. She had had all kinds of men make her all kinds of promise and she’s skeptical. She’s cynical. She doesn’t trust a man who seems to be promising more than he could possibly deliver.

추정 3: 그는 너무 좋아서 진짜일 수 없는 제안을 하고 있다.
이 여인은 그의 갈증을 영원히 해결해 줄 물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에게 모든 종류의 약속을 하는 수많은 종류의 남자들을 가졌었다. 그래서 그녀는 회의적이다. 냉소적이다. 그녀는 가능한 이상의 약속을 하고 있는 남자를 신뢰치 않는다. 

She makes a number of false assumptions about Jesus and the gift he offers her. Those assumptions keep her from getting too close. Each assumption is like a brick in the wall that separates her from grace. And as their conversation continues she’s ready to be done, so she tries to wrap it up.

그녀는 예수님에 대해서 또 그녀에게 제공하는 선물에 대해서 수많은 거짓된 추정들을 한다. 그 추정들 때문에 그녀는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피한다. 각각의 추정은 그녀를 은혜로부터 갈라놓는 벽의 벽돌과 같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가 계속될 때 그녀는 끝낼 준비가 되고 마감하려고 한다.

The woman said, “I know that Messiah (called Christ) is coming. When he comes, he will explain everything to us.”      (v.25)

그 여인이 말했다. “저는 메시야가 (그리스도라고 불리우는 분이)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실 때 그분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시겠지요. (25절)

Don’t miss the irony. She says to Jesus, I know that when Jesus comes he’ll make things clear. And I don’t know for sure, but I’m fairly certain Jesus couldn’t help but give a slight smile when he said to her,

I, the one speaking to you – I am he. (v.26)

아이러니를 놓치지 마시라. 그녀가 예수님께 말한다. “저는 예수께서 오실 때 모든 것을 분명히 하실 것을 압니다.” 그리고 나는 확실히 모릅니다만 제법 확신하는데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실 때 가벼운 미소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당신에게 말하는 내가 바로 그 메시야요. (26절)

 

This is the only time in his entire life when Jesus voluntarily and candidly tells someone he is the Messiah, the Son of God. And it’s to this Samaritan woman with a bad reputation who’s been married five times and is now living with some other guy. How’s that for grace?

예수께서 그의 전 생애에 자발적으로 솔직하게 어떤 사람을 보고 자기가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때가 이때 뿐이다. 그것은 다섯 번 결혼하고 지금은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평판이 나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은혜를 인한 것인가?

                       은혜에 의해 추적되는
                        Chased by Grace

When the truth about your life is hard to face, when you’ve made such a mess of things you don’t even know where to start cleaning up, when you can’t forgive yourself, and guilt and shame are your constant companions, it’s hard to imagine that grace is for you. Believe me, I get it.

당신 삶에 대한 진실을 직면하기 어려울 때, 어디서 해결하기를 시작할 것인지 조차 알지 못하는 이런 혼돈을 당신이 야기했을 때, 당신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때 그리고 죄책감과 수치심이 당신의 동료일 때 은혜가 당신을 위해 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Some of you think that the worst thing that could happen to you is that your sins will be found out and your secrets will be exposed. You’re afraid that someone’s going to bring up something you did a long time ago. You don’t want anyone to know, and since God already knows, you do your best to avoid him. You think the worst thing that could happen is that you get found out and are forced to confront the truth

어떤 이들은 생각한다.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당신의 죄들이 발견되고 당신의 비밀들이 노출될 때라고. 당신은 어떤 사람이 당신이 오래 전에 한 것을 끄집어내려고 하고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당신은 누군가가 알기를 원치 않고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은 그분을 피하려고 최선을 한다. 당신은 생가하기를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당신이 발견되고 그 진실을 대면하게 강요되는 것이다.

 


But that’s not the worst thing. The worst thing that could happen is that you go through your life and nobody knows. No one ever finds out. You just carry the weight of your guilt and shame around with you everywhere. The worst thing that could happen is that you spend your life trying to outrun God because you think he’s chasing you to collect what you owe – when he’s really chasing you to give you what you could never afford.

그러나 그것은 최악의 것이 아니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당신이 당신의 삶을 통과하고 있고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누구도 발견조차 하지 않는다. 당신은 도처에서 당신 주변에 당신의 죄책감과 수치의 무거운 짐을 그저 지고 다닌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당신이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당신이 그분에게 빚진 것을 모으기 위해서 당신을 추적하고 계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돌리려고 노력하면서 당신의 삶을 소비하는 것이다. 사실 그때는 당신이 결코 제공할 수 없는 것을 주시려고 그분이 정말로 당신을 추적하고 계신 때인 것이다.


                              아비와 아들
                            Father & Son

My uncle Dave and his son Wes began to talk from time to time, and after a few months they decided it was time to meet. My uncle lived in Missouri and Wes lived in Virginia, so they planned to meet at my house in Kentucky. We turned it into a miniature family reunion, and my grandparents and other extended family members were all there, excited to meet Wes.

내 삼촌 Dave 와 그의 아들 Wes 는 시시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3개월 후 만날 시간이 왔다. 내 삼촌은 미조우리에 살고 웨스는 버지니아에 살기 때문에 그들은 계획하기를 켄터키에 있는 우리 집에서 만나려고 했다. 우리는 그 만남을 소가족 재결합으로 (a miniature family reunion) 바꾸었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와 다른 여러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 거기에 있었고 웨스를 만나기 때문에 흥분되었다.

 

I’ll never forget standing in my driveway and watching as Wes pulled up with his beautiful family and my nervous uncle started walking toward their minvan. Wes stepped out, and we all wiped away the tears as we watched a father and son embrace for the first time.

나는 내 차도에 서있었던 것과 웨스가 그의 아름다운 가족들과 함께 멈추어 서고 우리의 신경이 예민한 삼촌이 웨스의 미니밴을 향해서 걷기를 시작하는 것을 바라본 것을 결코 있지 못할 것이다. 웨스는 차에서 내려서고 우리는 모두 아비와 아들이 처음으로 포옹하는 것을 바라볼 때 눈물을 훔쳤다.

 

I was too far away to hear what words were exchanged, but Wes gave my uncle a gift. A little later someone told me it was a watch. My uncle was really moved by the gift, but I didn’t quite understand why it meant so much to him. Don’t get me wrong; the watch seemed like a thoughtful gift, but I just didn’t understand why it would cause such an emotional response.
나는 너무 멀리 있어서 무슨 말들이 오고 갔는지를 들을 수 없었으나 웨스는 내 삼촌에게 선물을 주었다. 조금 후에 누가 내게 그것이 시계였다고 말했다. 우리 삼촌은 정말로 선물을 받고 마음이 감동되었으나 그것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의미를 가졌는지 그 이유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나를 잘못했다고 나무라지 마시라. 그 시계는 사려깊은 선물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왜 그 선물이 정서적인 반응을 일으킬 것인지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Later that day my dad brought the watch over and showed it to me. It was a nice watch, as far as watches go, but I still didn’t understand. Then my dad told me to turn it over. On the back there were two words engraved. Two words that have the power to change everything: Pure Grace.

그 날 후에 우리 아버지가 그 시계를 넘겨받아와서 내게 보여주셨다. 그것은 시계로서는 좋은 시계였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아버지가 내게 뒤집어 보라고 말씀하셨다. 시계 뒷면에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만 가지를 변화시킬 능력을 가진 두 단어, Pure Grace (순수한 은혜)였다.

                           순수한 은혜
                           Pure Grace

The grace effect soon began to change my uncle. The weight of his shame and guilt suddenly fell from him. His hard heart became softer. Not long after this he ended a conversation we had by saying he loved me. He had never told me that before. He has become active in a church, and the pastor has become one of his good friends.

은혜의 효과는 곧 내 삼촌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그의 수치와 죄책의 무게가 갑자기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의 굳은

마음이 더 부드러워졌다. 이 일 후 오래지 않아서 그는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함으로써 대화를 마치셨다. 그는 이전에 내게 그런 말을 결코 한 적이 없었다. 그는 교회에서 적극적이 되었고 목사님이 그의 좋은 친구들 중의 한 분이 되셨다.

Maybe what surprise me most is that I get to tell you this story. I didn’t think my uncle would be comfortable with me sharing this story with you. After all, when he worked so hard for so long to keep it a secret, I was sure he wouldn’t want me to share it with the world. But I was wrong. That was exactly what he wanted. When I emailed him and asked for his blessing to share the sroty, here was his response:

아마도 가장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내가 이것을 당신들에게 말하게 된 것일 것이다. 나는 내 삼촌이 이 이야기를 당신들과 공유할 때 내게 편하게 대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결국 그가 그것을 비밀로 지키기 위하여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여 일했을 때 그는 내가 온 세상 사람들과 그 비밀을 공유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그러나 내가 틀렸다. 그것은 그분이 원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그에게 이메일로 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그분의 축복을 요청했을 때 그의 회신이 이것이다.

Please feel free to share my situation in any way that will express God’s love, mercy, and amazing grace to anyone      who needs it.

내 상황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누구에게라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놀라운 은혜를 표현하는 어떤 방도로도 나누는데 구애받지 않기를 바란다.
 

When I read his response, it reminded me of the change that took place in the heart of the woman at the well. Before she met Jesus, she didn’t want anyone to see her. She didn’t want anyone to know, and if they knew, she didn’t want to know that they knew. She could never forgive herself for what she had done or the person she had become. But then her life collided with grace, and suddenly she saw things differently.

내가 그의 회신을 읽을 때 그것은 우물가의 여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났던 그 변화를 내게 상기시켰다. 그 여인이 예수를 만나기 전에 그녀는 누구도 그녀를 보기를 원치 않았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안다면 그녀는 그들이 안다는 것을 알기를 원치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한 일과 그가 만든 자기의 사람됨 때문에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때 그녀의 삶은 은혜와 충돌했고 갑자기 그녀는 만사를 다르게 보았다.

The woman left her water jar beside the well and ran back to the village, telling everyone, “Come and see a man who told me everything I ever did! Could he possibly be the Messiah?” So the people came streaming from the village to -see him. (vv.28-30 NLT)

그녀는 그의 물동이를 우물 가에 남겨두고 동네로 뛰어 돌아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다. “와서 내게 내가 한 모든 것을 말씀하신 한 사람을 보시오. 그가 메시야이신 것이 가능할 것 아니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동네로부터 그분을 보려고 물밀듯이 왔다. (28-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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