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ure scripts (한글 강의록)/은혜가 더 크다

Grace is greater Ch.5.

코필아카데미 2024. 12. 20. 11:55


   

Kor-Phil Academy for the Bible & Theology  홈페이지 방문자분들께
(성경과 신학 연구를 위한 코-필 아카데미)


은혜가 더 크다이 책의 제5장을 우리 글로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전문 번역의 시간상, 정력상 과중한 부담을 덜고 또 독자의 시간과 정력도 덜어드릴 겸 요약적으로 소개해도 본 저자의 뜻이 충분히 전달될 수 있겠다 싶어서 이같이 게재하오니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회자는 설교 준비와 목회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일반 성도들도 이 정도의 글은 신학의 전문성이 크게 요구되지 않는 글로서 교회생활, 가정생활, 전반적인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터이니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Grace Is Greater (은혜가 더 크다)   

 저자 카일 아이들맨 (Kyle Idleman) 목사님은 5장 서두에서 자기의 경험담을 들려주면서 우리가 마음 속의 비통함에서 자유하는 길을 제시한다.

 그의 경험담이란 대충 이런 것이다. 그의 아내와 단 둘이 며칠(3박4일) 쉴 겸 어느 콘도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바쁜 목회자로서 참 휴식과 재충전의 좋은 기회였다.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 날 그곳을 떠날 때 생각지도 않은 일로 영 기분이 잡쳤다.

퇴실하는 시간이 오전 10시였는데 퇴실하면서 몇 가지를 고객에게 요구하는 콘도 측의 요구사항이 있었다.
   1. 침대의 시트를 벗겨놓을 것.
   2. 사용한 수건들은 복도에 내어놓을 것.
   3. 쓰레기를 내어놓을 것.
   4. 접시 닦는 기계에 그릇을 넣고 버튼을 눌러놓을 것. 


 이런 것들이다. 그렇게 다 했는데 한 가지 빠졌다. 버튼 누르기를 깜박했다. 가방을 들고 막 방을 나설 때 10시 5분이었는데 50 대 나이의 남자와 두 여자 분이 방을 정리하러 오다가 손님들이 5분 늦었다고 한 마디 한다. 목사는 사과를 했다. 그리고 3층에서 내려와 주차장 쪽으로 가는데 그 남자가 이 부부에게 불쾌한 소리를 질러댔다. 

“여보시오, 접시 닦는 기계에 그릇을 넣은 건 대단히 감사한데 버튼 누르기가 그리도 어렵소, 제기랄.”

 저자는 며칠 간 쉬면서 설교를 짬짬이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설교는 어떤 환경에서도 우리의 기쁨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주제였다. 그러나 그 사나이의 험악한 말씨, 비꼬는 말에 영 기분이 잡쳤다.

“버튼을 누르게 해서 대단히 미안하오. 그 정도의 일이 당신을 기진맥진하게라도 한단 말입니까?” 

That’s not what I did. I sat there steaming about how I had been disrespected. I heard my wife say, “Let’s just go.” I might have listened, but this is a woman who paid real money for The Life-Changing Magic of Tyding Up. I said, “Oh, no. That man needs to hear some hard truth.” I got out of the car, but before I could shut the door I heard my wife tell me, “Say a quick prayer on your way up.”

그 사나이가 맞받아 소리를 지릅니다. 카일 목사도 또 그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러다보니 그 사나이는 폭풍 몰아치듯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내가 들은 마지막 말은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다. 나는 이 상황에서 “항상 기뻐하라” 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친절하고”란 말씀을 기억했어야 하는데 차 안에 들어가서도 무시당했다는 것이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아내는 “여보, 그냥 갑시다.” 하지만 그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가서 한 마디 하려고 차에서 내렸는데 아내는 “가면서 잠시라도 기도하세요.” 라고 내게 말했다.

I started to head up the three flights of stairs to confront Mr. “Can’t push the button on the dishwasher in the condo but has plenty of energy to yell at me from the third-floor balcony.” After the first flight of stairs I felt convicted and embarrassed. By the second floor I was telling God I was sorry, and almost immediately it was impressed upon me that I needed to apologize and give the man a tip for his extra work. I opened my wallet, and all I had was a $100 bill. I thought, Well, apparently giving the man a tip is not what God  wants me to do.

그 사나이를 만나려고 날아가듯 가면서 “이 자가 버튼을 한 번 눌러줄 힘은 없는데 3층 발코니에서 내게 고함칠 힘은 있단 말이지!” 라고 생각하면서 2층을 향해 가는데 죄책감을 느꼈고 당황스러웠다. 이층까지 가면서 그는 하나님께 죄송하다고 말하고 있었고 가서 따질게 아니라 사과를 하고 버튼 누른 수고에 대해 팁을 주어야겠다는 감정에 싸였다. 지갑을 열어보니 100달라 짜리 지폐 한 장 밖에 없었다. “이 팁을 주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내 행동일거야”라고 마음먹었다.

I walked into the condo, and the second he saw me he started yelling again. I could hear a voice inside of me saying, One more round! But even though I didn’t feel like it, I said, “I want to apologize. I’m sure it’s frustrating to come in and clean up after someone who doesn’t do the little things. I’m sorry. I want to give this to you for the extra work you have to do and as a way to say thank you.” I held out the $100 bill. Almost immediately his eyes welled up with tears. He said, “Well, I wasn’t expecting that,” and began to apologize. Now my eyes were filled with tears.  I think we both wanted to hug it out, but instead we just shook hands.

그 방에 들어서자 그는 목사를 보고 다시 소리를 질러댔다. 그는 자기 속에서 “한판 더 붙어봐”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말했다. “사과하고 싶군요. 손님이 하지 않은 작은 일들을 와서 하는게 불만일 수 있겠죠. 미안합니다. 내가 할 일을 대신 해주었으니 감사의 뜻으로 이 돈을 드리겠습니다.” 돈을 건네주자 그 사나이는 갑자기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가 말했다. “이렇게 해주는 걸 예상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도 사과했다. 내 눈도 눈물로 가득했다. 그리고 악수를 나누었다.

 

I walked back down the steps, not feeling proud of that moment but instead brokenhearted that it had reached the point it did, and wondering in how many similar moments I had missed grace because of my pride. I began repenting of my sin to God.
How many times had God wanted me to show grace and humility but I was too arrogant and self-righteous? I opened the car door and sat down. I was crying. Well, not crying, just teary-eyed. My wife asked, “What happened?” I told her.  She patted me on the leg and said with a smile, “Oh, it’s so cute. You’re growing up.”
It was her playful way of letting me know she was proud of me, but the truth is that when it comes to expending grace over the little things, I should’ve grown up a long time ago.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 순간을 자랑스럽게 느끼지는 않았으나 상한 마음 대신에 그래야 할 행동을 했다는 그 순간을 자랑스러워 하면서  얼마나 비슷한 수많은 경우에 그가 자신의 자만심 때문에 은혜를 놓쳤었는가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경우 하나님은 그가 은혜와 겸손을 남에게 보이기를 원하셨는가. 그러나 그는 너무 거만하고 자기의에 사로잡힌 자였는가를 생각했다. 차문을 열고 자리에 앉아서 그는 울고 있었다. 아니 울었다기보다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아내가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요?” 그가 대답했다. 그는 사실대로 얘기했다. 아내는 그의 다리를 토닥거리며 미소를 띄고 말했다. “정말 멋있는데. . . 당신이 성장하고 있는거야요.

”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내의 장난기 서린 말이다. 은혜가 작은 일들 위에 뻗게 될 때 그가 오래 전에 성장했어어야만 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말이다.

                                성장하기
                              Growing Up

In Eph.4 Paul writes about the church (the “body of Christ”) being “built up” (v.12). He says we need to “become mature, attaining to the whole measure of the fullness of Christ,” (v.13). If we do that, Paul says, “we will no longer be infants,” and instead “we will grow to become in every aspect . . . mature” (vv.14-16).

에베소 4장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고”있음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바는 우리는 “성숙되어져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까지 도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v.13) 우리가 그것을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유아들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성장하여 성숙케 될 것이다.” (14-16절).

In this chapter of the Bible, which is all about growing up and living “a life worthy of the calling you have received” (v.1), we find the major application is letting go of bitterness and offering forgiveness.

1절에서 보듯이 엡4장은 성장과 “당신들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에 대한 말씀이다. 그 장에서 우리는 주된 적용이 비통함을 가게 하고 용서를 주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In your anger do not sin”: Do not let the sun go down while you are still angry, and do not give the devil a foothold.        (vv.26-27)

“당신들이 분냄으로 범죄하지 말라.”  “당신들이 아직 화가 나있는 동안 해가 떨어지게 말고 마귀에게 발판을 주지 말라.” (26-27절).

An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of God, with whom you were sealed for the day of redemption. Get rid of all          bitterness, rage, and anger, brawling and slander, along with every form of malice. Be kind and compassionate to one      another, forgiving each other, just as in Christ God forgave you. (vv.30-32)

“성령님을 슬프게 하지 말라. 당신들은 그분으로 구속의 날을 위해 인침을 받았소. 모든 비통함과 격노와 성냄, 소리지름과 비방을 온갖 모양의 악의와 함께 제거하시오. 친절하고 서로 동정하고 서로 용서하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당신들을 용서하심과 똑같이 하시오.” (30-32절).

Why, when we’re instructed to grow up and become mature in Christ, is the emphasis placed on offering grace and forgiveness?  I think it’s because we’re never more like God than when we forgive. Here in Eph.4, and throughout the Bible, we see a direct connection between the grace God gives us through Jesus and the grace we’re to give to each other.

우리가 성장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하라고 교훈을 받을 때 강조점이 은혜와 용서를 주라는 것에 놓일까? 내 생각에는 우리가 용서할 때보다 하나님과 더 같아지는 때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 엡4장에서 또 성경을 통털어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우리가 마땅히 서로 주어야할 은혜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이 있음을 본다.

Spiritually speaking, learning to forgive is growing up

영적으로 말하자면 용서하기를 배우는 것이 성장하는 것이다. 

In the last chapter we saw that the first step in the journey of giving grace is a willingness to forgive because you have been forgiven. These next three chapters will lay out three significant mile markers on this journey of giving grace.

이 5장에서 우리는 분노와 비통과 격분의 감정들을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리고 다음 장 (6장)에서 우리는 그 감정들에 게 이름과 얼굴을 붙이고 우리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을 하나님께 넘겨드리게 도전을 받을 것이다. (In the next chapter we will attach a name and a face to those feelings and be challenged to release the person who hurt us over to God.)

 

And then in the final chapter of this section, chapter 7, we will address the possibility of reconciliation. It’s not always possible and sometimes it’s not appropriate, but when forgiveness results in reconciliation it most accurately reflects God’s grace and forgiveness toward us.

리고 이 섹션의 마지막 장인 7장에서 우리는 화해의 가능성을 말하겠다. 그것은 항상 가능하지 않고 종종 그것은 적합하지 않으나 용서가 화해를 초래할 때 그것은 가장 정확하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반영한다.

Our emotions can tie us up, hold us down, and have a way of choking our resolve to forgive. They are roadblocks that keep us from moving forward with forgiveness.

우리의 감성들은 우리를 묶고, 억제할 수 있고 용서하기 위한 우리의 결심을 질식시킬 방도를 가질 수 있다. 그것들은 우리가 용서로써 앞으로 전진하는 것을 막는 길 위의 장애물들이다.

It’s time for some of us to grow up and do what we don’t feel like doing. Instead of making this journey dependent on our emotions, or relying on our own resolve, we need to ask the Holy Spirit to help us clean out our closets and finally get rid of the anger and the bitterness that have piled up and kept us from making progress.

우리 중 몇 사람들이 성장하고 우리가 하고 싶다고 느끼지 않는 것을 할 때이다. 우리의 감성들에 의존하는 이 여행을 하거나 우리 자신의 결심에 의존하는 대신에 우리는 성령님께 그가 우리의 옷방들을 깨끗이 청소하는데 도우시고 마침내는 차곡차곡 쌓아놓고 우리가 전진하지 못하게 하는 분노와 비통을 제거하는데 도우시도록 간청할 필요가 있다.

We tend to deal with our hurts and our anger in one of three ways.

우리는 우리의 상처들과 우리의 분노를 다음 세 가지들 중의 한 개 안에서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1. 억압 (Repression)

I started thinking about the wounds we receive in life and asked some of my Facebook friends to help me. I asked them to tell me about something they’ve experienced that has been difficult to forgive.

나는 (저자) 우리가 받는 상처들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고 내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나를 도우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들에게 용서하기 늘 어려웠다고 경험한 어떤 것에 대해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As I read through their responses, I was amazed how often I read sentences like “I’ve never told anyone this before,” or “I’ve been carrying this weight too long.”

그들의 응답들을 읽을 때 나는 이런 문장을 내가 얼마나 자주 읽었는가 놀랐다. “나는 이전에 이것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이 짐을 짊어지고 지내왔다.” 

Too often this is the way we deal with our hurts. Instead of surrendering them to God, we push them down and try to repress our anger. We think we are successfully dealing with our feelings by refusing to let them surface. The definition of repress is “to suppress something by force.” So there’s something that wants to come to the surface, but it’s held down.

너무 자주 이것은 우리가 우리 상처들을 처리하는 방법이다. 그 상처들을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대신에 우리는 그것들을 끌어내리고 우리의 분노를 억압하려고 애썼다. 우리는 그것들이 표면에 떠오르게 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우리의 감정들을 성공적으로 처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억압” (repress)이란 단어의 정의는 “억지로 무언가를 억압하다”이다. 그래서 표면으로 나오기를 원하는 어떤 것이 있으나 그것이 억압된다.

A lot of us were probably taught to deal with our emotions in this way. We don’t let anyone see them. We put them in a closet and we close the door. The problem is when we repress these emotions they don’t go away – they go toxic.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감정들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라고 가르침을 받은 듯하다. 우리는 누군가가 그것들을 (감성들) 보도록 허용치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을 옷방 속에 두고 문을 닫는다. 문제는 우리가 이 감성들을 억압할 때 그것들이 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독성을 갖게 된다. (The problem is when we repress these emotions they don’t go away – they go toxic.)

Have you ever watched Deadliest Catch? Before watching this reality show, I could never understand why Alaskan king crab cost so much. Now I do. Crab fisherman on the Bering Sea stay awake night after night, fighting against forty-foot waves and icy conditions to set seven-hundred-pound crab pots in hopes of putting an expensive dinner on your plate at the local Red Lobster.

당신은 “가장 치명적인 어획” (Deadliest Catch) 란 영상을 본 적이 있는가? 이 사실적인 쇼를 관람하기 전에 나는 왜 알라스카 킹 크랩이 그렇게 값이 비싼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나는 이해한다. 베링해에서 킹크랩을 잡는 어부들은 밤마다 깨어 있다. 그리고 700 파운드나 되는 크랩 항아리들을 설치하기 위해 12 미터가 넘는 파도와 얼음이 어는 환경들과 싸워야 하는데 바다 요리 레스토랑인 레드 랍스터 (Red Lobster)에서 당신의 쟁반 위에 값비싼 저녁 음식을 제공할 희망을 안고서 그러는 것이다.

If you’ve seen the show, you know there are plenty of injuries and no doctors. It turns out the Bering Sea is a breeding ground not only for crabs but also infections. In one episode, greenhorn John Walczyk injures his hand. His concerned shipmates do nothing for him other than call him a pansy and give him a hard time. Soon his hand gets infected. If you have a strong stomach, you can check it out online.

If not, I’ll describe it this way: the back of his hand and his middle finger were roughly the color of Pepto-Bismol and swollen like a water balloon. A water balloon filled not with water or Pepto-Bismol but with puss. Puss that was oozing out of a hole in the back of his finger. A nurse was called in to look at it and immediately told John to go to a doctor. The wound needed to be opened up, cleaned out, and then closed up so it could heal.

만일 당신이 그 쇼를 보았다면 알 것이다. 어부들이 많은 상처를 입는데 의사는 없다는 것을.  베링해는 크랩들만 아니라 병균들을 기르는 곳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한 이야기에서 풋내기 어부 죤 월칙이 그의 손에 상처를 입는다. 그의 동료들은 그를 여자같이 연약한 자라고 부르는 것 말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를 힘들게만 한다. 곧 그의 손이 감염되었다. 당신이 비위가 강하다면 온라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이들을 위하여 내가 설명하겠다. 그의 손등과 그의 가운데 손가락이 대략 펲토-비스몰 색 (Pepto-Bismol: 메스꺼움, 소화불량 때문에 속쓰림, 소화불량, 배탈, 설사등에 효과적인 약으로 사용되는 브랜드. 밝은 핑크색을 띈 약) 이고 물로 찬 풍선처럼 부어올랐다. 물로 가득 찬 풍선이 아니라 고름(pus)으로 가득 찬 풍선처럼. 그의 손가락 등에 있는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고름이다. 간호사가 호출되어서 그것을 보고 곧장 죤에게 의사에게 가라고 말했다. 그 상처는 절개되어 깨끗이 닦아내고 그것이 아물도록 봉합될 필요가 있었다.

I’ve never done any crab fishing on the Bering Sea. I wouldn’t spend the money to eat crabs from the Bering Sea. But as pastor I have been called in to talk to countless people who have been hurt deeply and have lived too long with a severe infection. Often I discover the person was wounded earlier in life but ignored their emotions, so healing  did not take place. The infection of bitterness set in and, untreated, has spread.

나는 베링해에서 클랩 낙시를 해본 적이 없다. 나는 베링해에서 잡아온 크랩을 먹기 위해 돈을 쓰지 않으련다. 그러나 목사로서  나는 깊이 상처을 입고 너무나 오래 심각한 감염을 갖고 살아온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게 부름을 받았다. 자주 나는 생애의 초기에 상처를 입었으나 그들의 정서를 무시해서 (소홀히 해서) 치료가 일어나지 않은 사람을 발견한다. 비통함의 감염이 꽂혔고 처리되지 않았고 확산되었다.

In each of these conversations I think of the verse we keep coming back to: “See to it that no one misses the grace of God and that no bitter root grows up to cause trouble and defile many” (Heb.12:15 NIV 1984). Repressing anger leads to bitterness that can lead to missing out on the grace of God. If there is any hope for healing, we have to stop repressing our feelings, hold them up and examine them one piece at a time, and decide if we want to keep them or let them go.

이 대화들 각각에서 나는 우리가 계속 되돌아가야 할 말씀,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고 또 쓴 뿌리가 곤란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도록 주의하라” (히 12:15)는 말씀을 생각한다. 억압하는 분노를 비통으로 가는데 그 비통이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는 데로 이끈다. (Repressing anger leads to bitterness that can lead to missing out on the grace of God.) 만일 치료의 어떤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감정들을 억압하는 것을 멈추어야 하고 그것들을 치켜들고 한 번에 한 개씩 점검하고 우리가 그것들을 보존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그것들이 가게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한다.

How can we tell if we have repressed anger or bitterness from wounds we received? Look for these warning signs.

우리가 받은 상처들로부터 온 분노나 비통을 억압했다면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다음 경고 신호들을 보자.

One is if we have become disproportionately angry over little things. The anger we’ve allowed to pile up in our closet eventually forces down the door and begins to spill out. We find ourselves feeling irritable and angry over small things. We – and those around us – see our constant irritability or our angry outbursts and think, Where did that come from?

1. 우리가 작은 것들에 대해 불균형적으로 분노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 옷방 안에 쌓이게 허용한 분노가 결과적으로 문을 내리눌러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우리 자신이 작은 것들 때문에 초조해지고 분노하는 것을 느낀다. 우리가 우리의 끊임없는 초조함을 보거나 우리 분노가 폭발하고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지?” 라고 한다.

It’s the guy at the hotel waiting for the elevator that isn’t arriving quickly enough. So he’s violently pushing the arrow button as his face turns increasingly red. He starts demanding, “Where is the elevator!?” Often this guy is not just angry with the elevator. There’s something under the surface. That’s the thing about suppressing our anger; eventually it’s going to come up. Perhaps you’ve experienced this. Someone cuts you off in traffic and disproportionate anger comes exploding out of you. Or you find yourself yelling at your kid because of a split milk. A lot of anger over a little thing might reveal repressed bitterness that has turned toxic and is seeping out.

호텔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계속 버튼을 눌러대고 얼굴이 점점 붉게 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화가 난 것이 아니고 표면 아래에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분노를 억압한 것에 관한 어떤 것이다. 결국 그 분노가 올라오고 있다. 차량운행 중에 누군가가 당신 앞에 끼어들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당신에게서 폭발되어 나온다. 당신이 아이가 우유를 흘렸다고 그에게 고항을 지르는 자신을 본다.  작은 일에 대한 큰 분노는 억압된 비통함을 드러낼 것인데 그것은 독성이 되고 스며나오고 있다.

Another indication is if we complain about everything. People who repress resentment over hurts they’ve received tend to see everything through a negative lens. They constantly complain about teachers, coworkers, neighbors, relatives, servers, and other drivers. They can find the negative in anything. Instead of seeing the world through the lens of grace, they see the world through the lens of bitterness. It can end up defining them and that type of negativity has a way of becoming self-fulfilling.

2. 또 다른 징후는 모든 것에 대한 불평이다. 그들이 받은 상처 때문에 일어난 분개를 억압하는 사람은 만사를 부정적 렌즈를 통해 보는 경향이 있다. 교사에 대해, 동업자에 대해, 이웃에 대해, 친척들에 대해, 서버에 대해, 다른 운전자들에 대해 그들은 끊임없이 불평한다. 은혜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대신에 그들은 비통함의 렌즈를 통해서 세상을 본다. (Instead of seeing the world through the lens of grace, they see the world through the lens of bitterness.)  그것은 그것들을 규정하는 것으로 끝날 수 있고 부정적 성향의 형태는 자기충족적이 되는 길을 택한다. (It can end up defining them and that type of negativity has a way of becoming self-fulfilling.)
   

Another sign we may have repressed anger is if we’re overly sensitive and defensive. In fact, you might be feeling a bit defensive right now reading this chapter. Wait, it sounds like you’re describing me. But I’m not overly sensitive and defensive! Right. . . .

3. 우리가 분노를 억압했을지 모른다는 또 다른 징후는 우리가 과도하게 예민하고 방어적이 되는 것이다. 사실 당신은 지금 이 장을 읽으면서 다소 방어적일 수 있다. “잠간, 그 말은 나를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그러나 나는 과도하게 예민하고 방어적이 아닙니다.”

You might say, “I’m not overly sensitive and defensive. I know that, because no one has ever told me I’m overly sensitive or defensive.” Do you know why no one has ever told you you’re overly sensitive and defensive? It’s because you’re overly sensitive and defensive. They don’t want to tell you because they don’t want you to become angry. So they do their best to avoid you.

당신이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무도 당신이 지나치게 예민하고 방어적이라고 말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왜 당신에게 그런 말을 안 했을까? 그것은 당신이 과도하게 예민하고 방어적이기 때문에 당신을 화나게 하지 않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Your coworkers quickly walk past your office and pretend to be on their cell phone. Your kids come in the door from school and spend the evening in their rooms in hopes of not setting you off. Your spouse is curled up in a fetal position in the corner of the house hoping to go unnoticed and scared that you might erupt.

당신의 동업자가 빨리 당신 사무실 앞을 지나가면서 휴대폰을 거는 듯 가장한다. 당신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그들 방에서 저녁시간을 보내는 것은 당신이 소란을 피우지 않게 할 희망에서 그런 것이다. 당신의 배우자가 태아처럼 몸을 구푸리고 있는 것은 당신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고 당신이 폭발할까 두려워서이다.

 You may think you’ve kept these emotions contained in the closet, but if you find that you get disproportionately upset, have a tendency to complain, or respond defensively, then maybe some of that bitterness, rage, and anger are spilling out.

당신이 옷방 안에다 이 감정들을 두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신이 균형을 잃고 흥분되었거나 불평하는 경향이 있거나 방어적으로 반응한다고 발견한다면 아마도 그 비통, 격노, 분노의 어떤 것은 흘러나오고 있을지 모른다.

2. 반복 (Rehearsal)

Have you ever had a favorite movie you kept saved on your DVR so you could watch it again and again? Maybe you watch Elf every Christmas season, or Hoosiers every basketball season, or Revenge of the Nerds every . . . nerd season?

좋아하는 영화를 다시 보려고 DVR (DVD,VHS)에 저장해둔 적이 있는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하는 그 일을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가장 나쁜 기억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는 경향이 있다. 

What we intentionally do with our favorite movies we often unintentionally do with our least favorite memories. We keep the moment of betrayal or the hateful words or the unfair treatment cued up and ready to play. You don’t repress what happened to you, you rehearse it. Rehash it. Replay it. Again and again. And it turns your hurt into resentment. You think that if you don’t, you’re letting the person get away with what they did – bur really you’re just letting them continue to hurt you. You stop any healing that may have started by tearing off the scab and watching it bleed. 

우리는 배신의 순간, 증오스런 말들, 혹은 불공평한 대우들은 간직해두고 그것을 틀어서 듣는 준비가 되어있다. 당신은 당신에게 일어난 것을 억압하지 않고 그것을 반복한다. 그것을 재탕한다. 당신은 생각하기를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을 그냥 놓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참으로 당신은 그저 그들이 계속 당신에게 상처를 주게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상처의 딱지를 떼어냄으로써 시작되었을 수도 있는 치료를 중단하는 것이다. 

Remember what Paul wrote in Eph. 4:26-27: “Do not let the sun go down while you are still angry, and do not give the devil a foothold.” The anger we hold on to give the devil a foothold in our lives. The word foothold captures the idea of an opportunity. Another way to think of it is, “Do not give the devil a staging ground.” The idea is that when we repress or rehearse anger, we are giving the devil a place to establish a base camp from which he is able to carry out his missions. Unresolved anger is an open door the devil can walk through and use to gain access to the rest of the rooms in our house.

바울이 엡 4:26-27에 쓴 말씀을 기억하자. “당신들이 아직 화가 나 있는 동안에 해가 지게 하지 말라. 그리고 마귀에게 발판을 주지 말라.”
(Do not let the sun go down while you are still angry, and do not give the devil a foothold.)  “발판”이란 단어는 기회라는 개념을 담고 있다. 다른 표현은 “마귀에게 올라설 근거지를 주지 말라”이다. 우리가 억압하고 화를 반복할 때 우리는 마귀에게 그가 자기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전초기지를 건설할 장소를 주고 있는 것이다. 미해결된 분노는 마귀가 그곳을 통과해서 걸을 수 있고 우리 집의 나머지 방들에 접근하기 위해 사용하는 열린 문이다. 

All kinds of health issues are connected to chronic anger, like heart disease, stroke, blood pressure, arthritis, insomnia, gastrointestinal problems, ulcers, lupus, skin problems, and sleep problems. Bitterness can create new health problems or exacerbate existing ones. The truth is these emotions not only mess with our minds but can actually threaten our lives. It’s been said that not forgiving someone is like drinking poison and then waiting for the other person to die, and that may be more true than we think.

모든 종류의 건강 문제들은 만성적인 분노와 연관된다. 심장질환, 뇌졸중, 혈압, 관절염, 불면증, 위장의 문제들, 궤양, 낭창(결핵성 피부병의 하나), 피부 문제들, 그리고 수면 문제들과 같은 것들이다. 비통은 새로운 건강 문제들을 만들어내고 존속해온 문제들을 악화시킨다. 이 감성들은 우리의 이성적 마음에 끼어들어 방해를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우리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음은 마치 독을 마시는 것과 같고 그리고나서 타인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기보다 더 진실일 수 있다.

An article in the New York Times declared, “Researchers have gathered a wealth of data largely suggesting that chronic anger is so damaging to the body that it ranks with – or even exceeds – cigarette smoking, obesity, and a high-fat diet as a powerful risk factor for early death.”1 In a study at the University of Michigan, a group of women were tested to determine which were harboring long-term bitterness. Then all the women were tracked for eighteen years, and the outcome was startling: women with suppressed anger were three times more likely to have died during the study than those who didn’t have that kind of bitter hostility.2
뉴욕타임즈에 있는 한 기사는 선언했다. “조사자들은 만성적인 분노가 육체에 그렇게 손상을 주어서 그것은 흡연, 비만, 고지방 식단과 맞먹고 – 초과일 수도 있다 – 조기 사망의 유력한 위험요소라는 것을 대체로 제시하는 풍부한 데이터를 수집했다.”  미시간대학의 한 연구에서 한 그룹의 여성들이 어떤 것이 장기간 비통함을 품고 있는가를 결정하는 테스트를 받았다. 그래서 모든 여성들이 18년 간 추적을 받았는데 그 결과는 놀라웠다. 억압된 분노를 지난 여성들이 쓰디쓴 적대감과 같은 것을 가지지 않은 그들보다 그 연구기간 동안 세 곱절이나 더 죽은 것으로 나타났다.  

Rehearsed anger can also lead to relationship problems. Bitterness can destroy any chance we have at intimacy in marriage. Our unresolved anger toward a parent can cause us to have misplaced anger toward our spouse, or anger toward our spouse can lead to misplaced anger at our job. This is called transference. I think the devil came up with transference. He loves to use our anger to wreak havoc in our relationships. Or it may not be misplaced anger, it may simply be that you don’t  have  the  emotional energy you need for your relation

ships because you drained it all to nurse your resentment toward someone who’s not even a part of your life anymore.

반복된 분노는 또한 인간관계의 문제들로 진전될 수 있다. 비통함은 결혼생활에 있어서 친근함을 갖는 기회를 파괴할 수 있다. 부모를 향한 미해결의 분노는 배우자를 향해 잘못 겨냥된 분노를 일으킬 수 있거나 직장에서 잘못 겨냥된 분노로 이끌 수가 있다. 이것을 감정 전이(轉移 transference)라고 한다. 나는 마귀가 감정전이를 수립한다고 생각한다.마귀는 우리 인간관계를 파괴하기 위해서 우리 분노를 이용하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잘못 겨냥된 분노가 아니라 그저 단순히 당신의 인간관계를 위해 필요로 하는 정서적 에너지를 갖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당신 인생의 더 이상 한 부분도 아닌 사람을 향한 분개를 다루느라 그 에너지를 다 소모했기 때문이다. (The devil loves to use our anger to wreak havoc in our relationships. Or it may not be misplaced anger, it may simply be that you don’t have the emotional energy you need for your relationships because you drained it all to nurse your resentment toward someone who’s not even a part of your life anymore.)

Rehearsed anger also does damage spiritually. In the passage in Ephesians about not sinning in our anger and getting rid of our bitterness, we’re warned, “Do not grieve the Holy Spirit” (Eph. 4:30). Why would the Holy Spirit be grieved because of anger in our hearts? Because our hearts are his home.

반복된 분노는 또한 영적으로 손상을 준다. 에베소서의 구절, 우리의 분노 중에 범죄하지 않고, 우리의 비통함을 제거하는 것에 대한 말씀에서 우리는 경고를 받는다. “성령님을 슬프시게 말라” (엡 4:30). 성령님은 왜 우리 마음 속에 분노 때문에 슬퍼지는가? 그것은 우리 마음이 그분의 집이기 때문이다.

The Holy Spirit has made his home in your heart. He is working to help grow us up. He is working to grow his fruit in our lives. Gal. 5 tells us the kind of fruit the Holy Spirit wants to grow in our hearts: love, joy, peace, patience, kindness, goodness, gentleness, faithfulness, and self-control (vv.22-23). But if we keep rehearsing anger, the weeds of bitterness and rage begin to grow and choke out the fruit that the Holy Spirit wants to produce in our lives.

성령님은 당신 마음 안에 그의 거처를 만드셨다. 그분은 우리가 성장하게 도우시려고 일하고 계시다. 우리 삶 속에 그분의 열매를 키우기 위하여 일하고 계시다. 갈 5장은 성령님 안에서 맺는 열매의 종류를 우리에게 말한다. 사랑, 희락, 평안, 인내, 자비, 양선, 온유, 충성, 절제 (22-23절). 그러나 우리가 반복된 분노를 그대로 갖고 있으면 비통과 격노의 잡초들이 자라기 시작하여 성령님이 우리 삶 속에서 생산하기를 원하시는 그 열매를 질식시킨다.

3. 양도(讓渡 Release 넘겨주기)

I know on the surface Paul’s direction to “get rid of it” doesn’t seem helpful. Obviously if it was just a matter of getting rid of it, we would have done that a long time ago. I don’t think Paul is trying to be dismissive or simplistic but rather wants us to understand that this is the only option.

표면상으로는 바울의 “제거하라”는 지시가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나는 알고 있다. 분명히 그것이 그저 (분노를) 제거하는 문제라면 우리는 오래 전에 그것을 했을 것이다. 나는 바울 사도가 거부하거나 단순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고 오히려 그는 우리가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선택이라고 이해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We can repress or rehearse our anger, or we can take the third option: we can release it. We’ll delve deeper into this in the next chapter, but for now let me assure you that releasing it does not make light of what happened to you. It doesn’t diminish the seriousness of the offense or the severity of your pain. Saying “release it” may sound simple, but releasing it is extremely difficult. In fact, it might even be impossible on your own.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억압하거나 반복할 수 있고 혹은 제3의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그 분노를 양도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 이 문제를 깊이 뒤져보겠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 분노를 양도하는 것이 당신에게 일어난 것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확언하겠다. 그것은 범죄의 심각성이나 당신의 고통의 심각성을 감소하지 않는다. “그것을 양도하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하게 들릴 수 있으나 그것을 양도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사실상 그것은 당신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Saying “release it” sounds fine as a general concept to dealing with anger, but when “release it” gets applied to a person’s specific situation, it’s easy to dismiss as simplistic and unrealistic.

“그것을 양도해버려”라고 말하는 것은 분노를 처리하는 일반적인 개념으로서 좋게 들릴지 모르나 “그것을 양도해버려”가 개인의 특별한 상황에 적용될 때 그것은 단순하고 비현실적으로 무시해버리기 쉽다.

So let’s look at a case study in the Bible – a man named Stephen. He was an early church leader at a time when there was a lot of opposition to speaking Jesus. In Acts 7 Stephen tells a huge crowd about who Jesus is and he did for them. Here’s how they responded.

그러므로 성경에서 한 경우를 보도록 하자 – 스테판이라고 하는 사람의 경우를. 그는 핍박의 시대에 예수가 누구신지, 그가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말한다. (행7장). 그의 말에 사람들이 대답한다.

 At this they covered their ears and, yelling at the top of their voices, they all rushed at him, dragged him out of the city     and began to stone him. Meanwhile, the witnesses laid their coats at the feet of a young man named Saul. (vv.57-58)

이 말에 그들이 귀를 닫고 최대의 고성을 그에게 지르며 그에게 돌진하여 그를 그 도시에서 끌어내고 그에게 돌 던지기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 편에서는 증인들이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의 발 앞에 그들의 겉옷들을 놓았다. (행 7:57-58).

How would you react when a group of hate-filled people starts throwing rocks at you, knowing they’ll continue until you’re dead? Here’s what Stephen did:

증오심으로 가득 찬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당신에게 돌을 던지기를 시작할 때, 그리고 그들이 당신이 죽기까지 계속 그럴 것을 알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스테판이 이렇게 했다.

 While they were stoning him, Stephen prayed, “Lord Jesus,receive my spirit.” Then he fell on his knees and cried        out, “Lord do not hold this sin against them.” When he had said this, he fell asleep. (vv.59-60)

그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있을 때 스테판은 기도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그리고나서 그는 무릎을 꿇고 외쳤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가 이 말을 했을 때 그는 잠들었다. (59-60절).

Stephen prayed that God would offer his murderers grace and forgiveness. Where do you think he learned to pray like that?

스테판은 하나님께서 그를 살해한 자들에게 은혜와 용서를 주시라고 기도했다. 당신 생각에 그가 어디서 이같은 기도를 배웠을 것 같은가? 

When Jesus was crucified, he prayed from the cross for those who were killing him,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do not know what they are doing” (Luke 23:34). Jesus prayed that God would offer his murderers grace and forgiveness.
I wonder some things when I read all this.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그는 자기를 죽이고 있는 자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린 채 기도하셨다. “아버지, 그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이 자기들이 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눅 23:34).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살인자들에게 은혜와 용서를 주시라고 기도하셨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읽을 때 몇 가지들이 의아하다.

 

First, I wonder if Stephen was close to the cross when Jesus died and heard him, or if maybe John told Stephen about what Jesus prayed.
Second, I wonder if Jesus and Stephen both prayed that God would forgive their murderers, instead of just offering forgiveness themselves, because ultimately what matters most, what people need most, is God’s forgiveness, not ours.
Third, I wonder if maybe Jesus, and especially Stephen, prayed God would forgive them because in that moment they didn’t have forgiveness to give. I said forgiveness isn’t simple; it’s difficult and maybe even impossible on our own. Perhaps Stephen couldn’t muster up the grace to say, “I forgive you” to the men who were killing him, so instead he prayed that God would, which is what they really needed anyway.
  1. 예수께서 죽으실 때 십자가에 가까이 있었고 그의 말씀을 들었을까? 혹은 요한이 그에게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에 대해        말해주었을까?
  2. 예수님과 스테판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그 살인자들을 용서해주는 대신 하나님께서 그 살인자들을 용서하시라고 기 

       도했을까?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이기 때문이다.
  3. 아마도 예수께서, 특별히 스테판이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을까? 그 순간 그들은 줄 용서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

      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 나는 용서가 단순치 않다고 말했다. 그것은 어렵고 우리 자신의 힘

      으로는 불가능하기까지 할지 모른다. 아마도 스테판은 자기를 죽이고 있는 자들에게 “나는 당신들을 용서한다”라고 말

      하는 은혜를 긁어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대신 하나님이 하시라고 기도했는데 그것이 정말로 어떻든 필요한 것

      이다.

 

When we live in grace, releasing doesn’t mean giving up, it means giving it to God. When I say “release it” I’m not saying to let it go into some mystical abyss of bad feelings. It’s not that you randomly or arbitrary release it. No, you release it to God. You decide to let him carry the weight of what was done to you. You decide to trust him to deal with the other person. You loosen your grip from the pain of what was done to you and you place it in God’s hands.

우리가 은혜 안에서 살 때 양도함은 포기를 뜻하지 않고 하나님께 그것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그것을 양도한다”라고 말할 때 나는 그것이 어떤 나쁜 감정들의 신비한 심연 속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 말하고 있지 않다. 당신이 무작위로 혹은 인위적으로 그것을 양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당신은 그것을 하나님께 넘긴다. (You release it to God).  당신은 당신에게 행해진 것의 무게를 하나님께서 옮기시게 결심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를 신뢰하여 그분이 다른 사람을 처리하게 하는 것이다. 당신이 당신에게 행해진 것의 고통 때문에 꽉 잡은 것을 느슨하게 풀어서 그것을 하나님의 손 안에 두는 것이다. (You loosen your grip from the pain of what was done to you and you place it in God’s hands.)
  (홈페이지 운영자의 첨부: release 란 단어를 “양도”라고 번역하여 좀 뜻 전달이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 감이 있었는데 위의 설명을 읽으시면 “양도”의 뜻이 명확해 집니다. 내가 당한 억울한 일이나 손해를 내가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처리하시도록 그분에게 넘겨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Prayer is what makes forgiveness possible – what makes the impossible possible. Jesus and Stephen didn’t look their murderers in the eye and say, “I forgive you.” They looked up to heaven and said, “God, forgive them.” And maybe if you’ve struggled to forgive, this is a good place to start. Perhaps the first step isn’t to go to the person and say, “I forgive you,” but to pray and ask God to do what you haven’t been able to do.

기도는 용서를 가능케 만든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과 스테판은 눈으로 그 살인자들을 바라보고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들을 용서하오.” 그들은 하늘을 우러러 보고 말했다. “하나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리고 아마도 당신이 용서하기 위해 투쟁을 했다면 이것이 출발하기 좋은 자리이다. 아마 첫째 단계는 그 사람에게 가서 “내가 당신을 용서하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분이 당신이 할 수 없었던 것을 하시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I mentioned asking Facebook friends to share their stories of being wounded. I was inspired by so many of them. As I read their stories I was humbled by how many times I have held tightly to my anger and refused to release it to God. Here’s a comment that I hope will help you believe that you can do this:

내가 앞에서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그들의 상처받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자고 말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그들의 많은 이야기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내가 그들의 이야기들을 읽을 때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이 내 분노에 매달렸고 그것을 하나님께 넘겨드리기를 거부해왔던 가를 생각하면서 겸손해졌다. 당신이 이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도울 희망으로 이 페이브북 친구의 글을 소개한다.

We had been married for almost thirteen years when his company relocated us to Baltimore, MD. I gave up my family,  friends, career, and church home of more than twenty years    . . . I knew when I arrived in Baltimore that something felt  different . . . Five months after our move I learned he had been using online pornography and that the problem went      back months earlier and had become a serious addiction. I immediately prayed God would give me the words to say to    him without allowing my anger and hurt in this betrayal to take hold, but my husband’s response to me was callous and  indifferent. I would learn in the months to follow that is a typical response for a Sexual Anorexic Sex Addict.

The problem was me, because he didn’t have a problem.

우리 부부는 남편의 회사가 메릴랜드주 볼티모에 우리를 이주하게 할 때 거의 13년 간 결혼생활을 해왔다. 나는 내 친정, 친구들, 경력, 그리고 20년 이상 다닌 모 교회를 포기했다. . . (첨부: 이주했기 때문에?) 내가  볼티모어에 도착했을 때 무언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을 알았다 . . 우리의 이사 이후 다섯 달 동안 나는 내 남편이 온라인 음란물 영상을 이용해왔음을 알았고 그 문제는 몇 달 전부터 있었고 심각한 중독이 되었다. 나는 즉각 하나님께 기도했다. 내가 이 배신에서 생긴 분노와 상처가 나를 붙잡게 하지 않고 할 말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나 내 남편의 반응은 냉담하고 무관심했다. 그 후로 몇 달간 그것은 성욕 부진증적인 성중독이라는 것을 (Sexual Anorexic Sex Addict) 알게 되었다. 문제는 내게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문제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I sought out counseling and we attended a Weekend to Remember marriage conference, but his heart was hardened.

나는 상담소를 찾았고 결혼을 기억하는 주말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Weekend Remember marriage conference) 그러나 그의 마음은 굳어졌다.

Six months later he left me and filed for divorce. The harder  I prayed, the more God would reveal my husband’s broken-
ness to me. The more I could understand his brokenness, the easier it was to forgive him. When I cried out, “I gave up    everything for him and he doesn’t care about me at all,” God whispered, I know exactly how you feel. My husband wasn’t just leaving me; he was running away from God. I was told  along the way that his salvation should be more important to me than saving our marriage, so I started to pray that way.

6개월 후에 그는 나를 떠났고 이혼소송을 했다. 더 열심히 기도할수록 하나님은 더욱 더 내 남편이 내게 대한 깨어진 마음을 보여주시곤 했다. 내가 남편의 깨진 마음을 더 이해하면 할수록 그를 이해하는 것이 더 쉬워졌다. 내가 “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고 그는 나를 전혀 신경쓰지 않아요”라고 외쳤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속삭이듯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어떻게 느끼는지 정확히 안단다.”  내 남편은 그저 나만 떠나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나는 도처에서 우리 결혼생활을 건져내는 것보다 내 남편의 구원이 내게 더욱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고 그래서 나는 그쪽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Several months into our separation I learned of another betrayal and lie, so I called to confront him. I prayed that      God would lead me in this conversation and that my words  would honor God above all else. Rather than confront him I found myself forgiving him for what he was doing to my life.    . . .

우리가 헤어진지 몇 달 후에 나는 또 다른 배신과 거짓말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를 만나기 위해 전화를 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 대화 속으로 인도하시고 내 언어가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기도했다. 그를 대결한다기보다 나는 그가 내 인생에 하고 있는 것 때문에 그를 용서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 . .

I continue to pray that God will pursue my ex-husband and the day will come when he truly puts Jesus on the throne of  his heart. I am free of bitterness and anger by the grace of God.

나는 하나님께서 내 전 남편을 추적하시기를 계속 기도했고 그가 참으로 그의 마음의 보좌에 예수님을 모시는 날이 오기를 기도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비통함과 분노에서 자유했다.

You may be thinking this woman’s testimony ins’t overly dramatic. In fact, parts of it may seem familiar, if not from your own life then perhaps the life of someone you know. And the ending wasn’t especially inspiring. They didn’t get back together. He didn’t repent of his sin or make things right with God. In many ways her circumstances didn’t change. If anything the hurt that was done to her not only continued but intensified. And yet she still feels free of bitterness and anger.

당신은 이 여성의 증언이 지나치게 극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그 이야기의 여러 부분들이 낯익은 장면이다. 만일 당신 자신의 삶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당신이 아는 어떤 사람의 삶으로부터 나온 이야기라면 그렇다. 그리고 그 마지막이 특별하게 영감을 주지도 않는다. 그 두 사람은 다시 회복되지도 않았다. 그 남자가 그의 죄를 회개하지도 않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지도 않았다. 많은 방면에서 그녀의 환경은 변하지 않았다. 만일 그녀에게 행해진 상처가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심해진 어떤 것이라면 그렇다. 그런데도 그녀는 여전히 비통함과 분노에서 자유하게 느끼고 있다.

What strikes me about this woman’s story is that she mentions praying for her unfaithful husband five times in only seven short paragraphs. Prayer is what makes forgiveness possible.

이 여인의 이야기에 있어서 나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그녀가 단 일곱 개 의 짧은 문단 속에서 다섯 번이나 그녀의 신실치 않은 남편을 위해 기도한다고 언급한 것이다. 기도는 용서를 가능케 만드는 것이다.

She offers forgiveness when he has done nothing to deserve it and hasn’t bothered to ask for it. This step of forgiveness is not dependent upon the person who hurt you to do something or say anything. It’s between you and God. You release the pain to him. If this woman could do it while having her life torn apart by her husband, if Stephen could do it while being stoned to death by his enemies, and if Jesus could do it while being nailed to a tree, then you can do it too. If you ask God, he will give you the grace you need. Take your anger and rage to him in prayer. Prayer is the release valve for your feelings of bitterness and anger.

그녀는 그 남자가 용서를 받기에 마땅한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용서해달라고 성가시게 하지도 않았는데 용서를 준다. 이 용서의 단계는 무언가를 하고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 당신에게 상처를 주는 그 사람에게 의존치 않는다. 용서는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있다. 당신은 고통을 그분께 넘겨드린다. 만일 이 여인이 그 남자에 의해서 찢어져버린 삶을 갖고도 용서를 줄 수 있었다면, 스테판이 그의 원수들에 의해 돌을 맞아 죽어가는 동안에도 그것을 할 수 있었다면,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동안에 그것을 하실 수 있었다면 당신도 그것을 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 구한다면 그분은 당신이 필요로 하는 은혜를 주실 것이다. 당신의 분노와 격노를 기도 중에 그분께 가져가라. 기도는 당신의 비통과 분노의 감정들을 하나님께 양도하는 밸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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