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ure scripts (한글 강의록)

Grace is greater Ch.10.

코필아카데미 2024. 12. 17. 09:11

은혜가 더 크다  (Grace Is Greater  Ch.10.)

 1921년에 스웨덴 사람 데이빗 플러드 (David Flood) 부부가 (부인: 스베아 플러드 Svea Flood) 두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그 당시에 벨기에 령 콩고라고 불리는 아프리카의 중심부에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이미 와 있는 다른 선교사 부부와 만났습니다. 그들은 한 동네를 찾아갔으나 마을의 추장은 선교를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동네에 거주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동네에서 약 1.6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거주해야 했고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은 추장의 허락 아래 그들에게 음식을 팔러오는 한 소년 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그 소년을 만날 때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얼마 지나서 다른 선교사 부부는 말라리아에 걸려 그곳을 떠나갔고 데이빗 부부만 남았는데 얼마 후 임신 중인 스베아가 (Svea Flood) 말라리아에 걸려 아이를 출산하고는 세상을 떴습니다. 아기는(Aggie) 딸이었습니다. 아내를 묻고 작은 십자가에 아내의 이름을 써서 무덤 앞에 세우고 데이빗 선교사는 아프리카 선교본부에 가서 사정을 말하고 갓난아기를 키울 수 없으니 입양을 부탁하고는 아들을 데리고 스웨덴으로 돌아갔습니다.

 갓난아기 딸은 (이름: 애기 Aggie) 미국에 입양되어서 거기서 성장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우체통을 열자 스웨덴에서 발간된 잡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스웨덴 글을 몰라서 책장을 휙휙 넘기면서 그림을 보다가 한 작은 무덤 사진과 글이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 무덤에 세워진 하얀 십자가 위에 눈에 익은 이름이 보였습니다. 이 딸은 죽은 엄마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바로 자기 엄마의 무덤인 것입니다. 스웨덴 글을 아는 사람을 찾아가 그 기사를 읽어달라고 했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본국으로 돌아간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녀는 스웨덴으로 가서 수소문하여 아버지가 재혼하여 낳은 4남매, 이복형제들을 만납니다. 아버지를 보고싶다 하니 그들의 말이, “아버지는 혼자 사시는데 많이 아프셔. 그리고 하나님이란 말만 나오면 화를 버럭 내셔.”

아버지의 작은 아파트에 들어서자 사방에 빈 술병이 딩굴고 있었습니다. “아빠, 저, 아버지의 딸 Aggie (애기)예요.

그 아버지는 딸을 보자 울면서 사과를 거듭합니다. “미안하다. 내가 너를 버려서 면목이 없구나.” 

“아니예요. 하나님이 저를 키우셨어요. 저는 잘 컸어요. 미안해하지 마세요.”
그 말을 듣고 그 아버지가 갑자기 굳은 표정이 되더니 울음을 그쳤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잊었단다.” 얼굴을 벽쪽으로 돌리면서 말합니다.
“그 하나님 때문에 우리의 삶이 이 지경이 되었어.” 
God forgot all of us. Our lives have been like this because of him.

 애기가 (Aggie) 말합니다. “아빠,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이 말은 참말이예요. 아버지, 엄마가 주님께로 인도한 그 소년이 자라서 온 동네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했어요. 아빠, 엄마가 뿌린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고 또 자랐어요. 오늘날 600 명 이상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주님을 예배하고 있어요. 아빠, 엄마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하셨기 때문이예요. 아빠가 아프리카에 가셨던 것이 헛되지 않았어요. 엄마가 헛되이 죽은 게 아니예요. 아빠, 예수님은 아빠를 사랑하셔요. 그분은 아빠를 미워하신 적이 없어요.”
 “Papa, I’ve got a story to tell you, and it’s a true one. The little boy you and Mom led to the Lord grew up to lead his entire village to faith in Jesus. The one seed you planted just kept growing and growing. Today more than six hundred African people are serving the Lord because you were faithful to the call of God in your life. You didn’t go to Africa in vain. Papa, Jesus loves you. He has never hated you.”

 데이빗은 깜짝 놀랐습니다. 부녀의 대화는 계속 되었고 그 날 저녁 데이빗은 수 십년간 원망과 절망으로 살아온 삶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주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인생살이는 바램대로만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롬 8:28 말씀을 안다. “ . .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라.” (And we know that in all things God works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him, who have been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NIV>)

 쉽게 표현한다면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바로우리 성도들이 아닌가!) 또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은 (밥로 우리 크리스챤들이 아닌가!) 모든 일이  - 좋은 일, 나쁜 일, 건강 혹은 질병, 부요함 혹은 가난, 사업성공 혹은 실패, 진급 혹은 실직, 인기 혹은 무시당함 등등 – 중간에는 어떻든지 마지막에는 그에게 좋은 결과로 끝난다는 말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끝까지 가보아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데이빗 선교사처럼 시작에서 좌절하여 인생을 수십 년간 비참한 심정으로 허비해서는 안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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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의 글을 잠시 벗어나서 저 개인의 말을 (홈페이지 관계자) 좀 하겠습니다. 성경의 인물이나 우리 기독교 역사의 인물들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세우심이 얼마나 확실합니까? 그런데 그들의 삶을 보면 그리 순탄치 않습니다. 우선 예수님부터 그렇고, 스데반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고, 요한 외의 모든 제자들이 다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평생 충성해서 세계 각처에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우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었나요. 그가 기록한 편지들은 오늘 우리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든든히 놓아주었지요. 그도 참수 당하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주기철 목사, 당대의 최고의 목회자, 설교자, 애국자였지만 일제에 의해 순교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고 (잘 되었다고) 인정하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을 비참하고 실패했다고 여겼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그 다음에 있을 풍성한 추수를 내다 보며 기쁨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의 순교를 예감하면서 쓴 고백, 딤후 4:7-8 을 보세요. 패배자의 심정이 아니라, 책임을 완성한 자, 전쟁에 승리한 개선장군의 고백이 아닙니까!  스데반의 순교는 사울이란 바리새인을 변화시키는 한 계기가, 위대한 전도자, 신학자를 배출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요? 사도들의 순교는 온 세상이 믿어 구원받는 길을 닦았습니다. 주기철의 순교는 일제의 기독교 말살과 조선의 병합 의도가 실패하고 한국 땅에서 구원의 복음이 꽃피고 열매맺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교회 역사학자 민경배 교수는 주기철의 굴하지 않은 신앙정신이 한국을 지키고 한국 기독교를 지켜냈다고 해석합니다).  롬 8:28 은 우리에게 모든 일의 처음과 중간까지만 보지 말고 끝까지 보아야 이 말씀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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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본 책으로 돌아갑니다. 저자는 하나님이 선하신데도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왜 고난을 허용하시는지 두 가지로 적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들에게 고난을 허용하심으로써 성도들이 예수님에게 더 가까워지기를 바라신다.  (역자의 첨부: 시 119:71, 고후 1:8-9 을 참고하십시오.)
 You can know God’s grace is working in your pain to draw you closer to Jesus.
고후 7:10 “For God sometimes uses sorrow in our lives to help us turn away from sin and seek eternal life.” (Living Bible)
역자가 번역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 삶 속에서 슬픔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죄로부터 돌아서서 영생을 추구하도록 도우신다.”

(홈페이지 운영자가 저자의 문장을 옮기겠습니다.)
 What you thought was the worst thing that ever happened to you ended up being the best thing that ever happened to you because it brought you closer to Jesus.
당신 생각에 최악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당신에게 일어났는데 그것이 당신에게 일어난 최선의 것으로 종결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최악의 것이) 당신을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데려갔기 때문이다.

That’s the difference grace makes. It doesn’t always take away our pain but it does something better – it redeems it. In our pain, we discover the presence of Jesus in a way that we never would have otherwise.
하나님의 은혜가 만들어내는 차이점이 그것이다. 우리의 고통을 항상 가져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이루어낸다. 다시 말하면 고통은 더 좋은 것으로 구속해낸다. 우리의 고통 속에서 우리는 달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임재를 발견하게 된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주심으로써 우리 성도들이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게 하신다.

 God’s grace takes all the broken pieces of our lives and put them together so that we look more like Jesus. After promising us that in all things God is working for the good in our lives, Paul gives us a further explanation of at least one way God brings about goodness.
Rom 8:29 “For those God foreknew he also predestined to be conformed to the image of his Son.”
하나님은 그 은혜로 우리 삶의 깨어진 조각조각들을 모아서 그것을 결합하여 우리가 더 예수처럼 보이게 만든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서 선을 이루게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신 후에 바울은 하나님이 선을 초래하는 최소한의 방식에 대하여 한 걸음 더 나간 설명을 우리에게 한다.
롬 8:29을 보자. “하나님께서는 그가 미리 아신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도록 또한 예정하셨다.”

                              목적이 있는 고난
                             Pain with Purpose

 여러 해 전에 내가 젊고 어리석은 시절에 출산의 고통에 대해 아내와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아내는 남자들이 출산에 따르는 고통의 수준을 견뎌야만 한다면 세상에 사람들이 없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 나는 여자의 출산에 비교할 만한 남자의 고통을 찾아보았더니 신장결석이라고 알았다. 내 아내가 인류의 절반을 차지하는 남자들의 고통 감내를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아내는 “고통을 선택하는 것과 선택이 없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자들은 고통을 견디기로 의식적으로 선택하기 때문에 남자보다 더 강인하다는 것인데 남자들은 신장결석을 겪기를 선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아내가 아주 큰 지적을 했다고 생각했다.  고통을 겪도록 환경이 몰아가서 당하는 것보다 고난을 통과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강인함이 다른 수준이다. 여자는 왜 고통을 겪기로 선택하곤 하는가? 여자는 고통이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It’s because she knows that the pain has a purpose.)

 출산의 고통은 좋고 값있는 것을 만들어낸다. 고통으로부터 오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고통이 목적이 있어서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한 우리는 고통을 견딜 힘을 찾을 수 있다.

 As long as we can have confidence that pain has a purpose, we can find strength to endure.

 바울은 우리에게 이 확신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일깨워준다. 우리 고통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무슨 고통이든지 낭비된 것이 아니라는 약속인 것이다. 그것은 무언가 선한 것을 생산하기 마련이다.
 Paul reminds us it is God’s grace that gives us this confidence. His grace in our pain is a promise that whatever pain we go through in this life does not get wasted. It will give birth to something good.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통이 너무 커 보일 때 해답을 찾고 싶어한다. 자주 묻는 질문중의 하나가 이런 것이다. “모든 일은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지 않을까요? 나는 하나님께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이유를 갖고 계실 것 같아요.” 삶의 고통이 나를 휘몰아 덮을 때 우리는 그것의 의미를 몹시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나는 (Kyle Idleman 목사) 항상 이유가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고 이유가 있다더라도 우리가 항상 그 이유를 이해한다고 전혀 확신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그 질문을 재구성하라고 사람들을 격려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죠?” 라는 질문 대신에 “그 목적이 무엇이죠?”라고 물으라고. 항상 이유가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 안에서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안다. 
(Because I don’t know if there is always a reason, but I know God in his grace always has a purpose.)

 “이유”와 “목적”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이유는  “무엇 때문에” (be-
cause) 를 찾으나 목적은 “무엇을 위하여” (for)에 초점을 맞춘다. 이유는 일어난 일로부터 이해가 되는 논리적 설명을 원한다. 목적은 일어난 일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그것을 유익하게 만드실 수 있다는 소망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Reason wants a logical explanation that will make sense out of something that has happened. Purpose offers us a hope that whatever has happened God can work for good.)

 요한복음 9장의 예수님과 태어나면서 눈먼 사람의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또는 누가복음 13장에서 망루가 실로암에서 무너져 내려서 18명의 무죄한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예수께서 들으신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들이 와서 예수께 묻는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났습니까? 설명 좀 해주세요.” 사람들은 이유를 알고저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만  여기에서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는 것을 주목해서 보라.”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으셨으나 목적이 있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그들을 확신시키고 계셨다.

 우리의 고통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고통이 목적 없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고통을 통하여 일하셔서 우리가 예수님을 더 닮도록 만드실 수 있으시다.  

 (God can work through it to make us more like Jesus.)

                          하나님의 은혜가 아플 때 
                            When Grace Hurts

 해롤드 윌키는 (Harold Wilke) 두 팔이 없이 태어났다. 성장하면서 다른 아이들에게는 자연스레 습득되는 일들이 그에게는 특별나게 어려웠다. 아주 어린아이로서 그가 셔츠를 혼자 입으려고 마루 위에서 싸움 싸우듯 했던 때를 그가 말한다. 그의 엄마와 이웃 사람들은 그가 마루 위에서 셔츠를 입으려고 몸부림칠 때 지켜보았다. 이웃이 그 엄마에게 왜 이 불쌍한 아이를 돕지 않느냐고 말했을 때 그 엄마는 양 옆구리에 팔짱을 단단히 끼고 턱은 꽉 다물고, 모든 본능을 거스리며 마침내는 이를 악문 채 대답했다. “나는 지금 저 애를 돕고 있어요.”

 당신이 고통을 통과하고 있을 때 혹은 당신이 고통을 가지고 살고 있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은 돕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할 듯하다.  물론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 돕고 계시다는 가능성을 숙고하자.  종종 은혜가 도울 만큼 아픔을 느낄 때가 있다. 암병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어쩌면 하나님은 암병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삶을 세밀히 조사하는데 도움이 되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영원에 대해 생각하게 도움이 되게 하실 수 있다. 당신이 당신 회사의 대표를 잘 견뎌낼 수 없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아마도 하나님은 견디기 어려운 대표로 하여금 우리가 절제하기를 배우는데 도움이 되고 그 업무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적합성을) 발견해내지 못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실 수 있다. 채용되지 못함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기란 어렵지만 아마 하나님께서는 미채용이 우리가 사람을 의존하고 있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실 수 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상한 마음의 고통이 우리의 우상숭배를 드러나게 하실 수 있고 우리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을 배우도록 하실 수 있다. 이런 류의 항목은 계속 열거할 수 있다. 이런 것이 당신의 삶에서 어떻게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가 있었나? 당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분이 당신의 고통을 통해 일하시고 당신의 삶 속에 그분의 선한 목적을 성취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How has this been true in your life? God’s grace to you is that he will work through your pain to accomplish his good purpose in your life.

C.S. 루이스는 그의 저서, “단순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 에서 이런 비유적 설명을 준다:

 “당신이 살아있는 집이라고 상상해보자. 하나님이 그 집을 다시 짓기 위해 들어오신다. 처음엔 아마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당신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배수관을 고치고 지붕에 물이 새지 않게 수리를 하신다. 당신은 그런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놀라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그가 그 집을 부수기 시작하는데 정말 끔찍할 정도로 아프고 이해도 되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그 이유는 그가 당신이 생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집을 짓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기에 새 건물을 짓고, 저기에 바닥을 추가하고, 탑을 쌓고, 마당을 만드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꽤 괜챦은 오두막으로 지어지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궁전을 짓고 계신 것이다. 그는 오셔서 직접 그 안에 살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도록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 지금은 그것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냥 계속 읽으라.

 어떤 경우에 우리는 영생에 이르기까지 계속 읽어야 할 것이다. “삶이 힘들다” (Life is hard)는 사실과 “하나님은 선하시다” (God is good) 이 두 가지 진실 사이에 있는 긴장감은 우리가 천국에서 하나님과 만날 때까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후 4장에서 이것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輕)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重)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17-18절).

 하나님은 당신의 나쁜 것에서 선한 것을 이끌어내실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이 당신을 더 가까이 이끄시거나 당신의 고통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볼 수 없을지라도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당신은 중간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계속 읽으라. 은혜가 최종 결정을 내릴 것이다.
 God will bring good out of your bad. And even if you can’t currently see how God might be drawing you closer or getting glory from your pain, you still need to remember: you’re in the middle. This isn’t the end of your story. Just keep reading. Grace will have the final word.
 (글 올리는 자의 첨부의 말: 여기서 계속 읽으라는 저자의 조언은 하나님이 당신 인생살이를 – 생활, 신앙, 헌신, 때로 실패, 고통, 의심, 낙심 등등 -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 마치 책을 쓰는 사람이 처음부터 시작하여 중간 중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적고 마지막에 그 결말을 쓰듯이 하나님은 신앙인인 당신의 삶속에서 함께 하시면서 그 결말이 “모든 것이 다 합쳐져서 결국은 좋은 것, 승리로운 것, 복된 것이 되게 작정하시고” 지금 인도하시고 계시는데 데이빗 선교사처럼 인생의 처음 고난, 중간의 사건들이 어렵다고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고 버리셨다고 단정하고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그 인생이 비참해질 수 밖에 없으니까 하나님의 선한 결말을 믿고 인내하면서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의미로 끝까지 읽으라고 권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