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ure scripts (한글 강의록)/은혜가 더 크다

Grace is greater Ch.4.

코필아카데미 2024. 11. 30. 17:34

 당신의 상처들보다 더 큰 치료
 More Healing Than Your Wounds

My wife is an organized person who enjoys making lists, creating systems, and putting things in their right place.  These are concepts I’m only vaguely familiar with

내 아내는 (Idleman’s wife) 조직적인 사람이고 목록 작성, 체계를 만들기 (creating systems), 물건들을 제 자리에 두기를 즐긴다. 내게는 이런 것들이 그저 모호하게 친숙할 뿐이다.

She has recently been reading a book called The Life-Changing Magic of Tidying Up. The subtitle is The Japanese Art of Decluttering and Organizing. So the premise of this book is that “tyding up” is “life-changing magic” and that “decluttering and organizing” is an “art.”

그녀가 최근에 “삶을 바꾸는 정돈의 마술” (The Life-Changing Magic of Tyding Up)이란 책을 읽으면서 지낸다. 그 책의 부제는 “잡동사니들을 처리하고 조직화하는 일본식 예술(기술)”이다. (The Japanese Art of Decluttering and Organizing). 그 책의 전제는 정돈이란 “삶을 바꾸는 마술”이고  잡동사니의 처리와 조직화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My wife was going through this book both by reading it and by listening to the audio version. One day I came home early from work and she had the audio version playing in the house. I found out she was listening to it while she was cleaning out her closet. 

아내는 이 책을 읽고 또 오디오판을 들으면서 이 책을 살펴보고 있다. 어느 날 귀가해보니 아내는 오디오판을 들으면서 그녀외 옷방(closet)을 청소하고 있었다. 

I listened to the author, Marie Kondo, explain that the key to cleaning out your closet is knowing exactly what you want to keep and then getting rid of everything else. She also explained how you make such difficult decisions. The trick is to pick up each and  every item, one at a time, and ask each item, “Do you spark joy?” If it does, you keep it. If not, you get rid of it. I couldn’t help but laugh at the thought of going through my closet, taking each item in my hand, and asking, “Do you spark joy?” 

나는 그 책의 저자인 마리 콘도(Marie Kondo)의 말을 들었는데 당신의 옷방을 청소하는 핵심 기술은 보존하고 싶은 것과 없앨 것을 정확히 아는 것이란다. 그 저자는 그렇게 구별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그 요령은 물건을 손에 들고서 그것에게 묻는 것이다. “너는 기쁨을 발산하니?” (Do you spark joy?) 그것이 기쁨을 발산하면 보존하고 그렇지 않으면 없애는 것이다. 나는 내 옷방을 지나가면서 물건을 손에 들고 그렇게 질문하는 나를 생각하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I was preparing to write this chapter, and listening to that audiobook made me think about how we become attached to emotions like anger and resentment. We store them in the closet of our hearts even though they don’t bring us joy and instead rob us of peace. Still, we just can’t seem to let them go. And over the years our anger and resentment start to pile up.

내가 이 책의 이 장(章)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었고 오디오북을 들으니 그것이 나로 하여금 우리가 분노와 분개와 같은 정서들에 우리가 얼마나 밀착되었는지에 (how we become attached to)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분노, 분개들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오지 않고 평안을 박탈하는데도 우리 마음의 옷방 안에 그것을 쌓아둔다. 우리는 여전히 그것들이 내게서 떠나가게 시킬 수 없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여러 해에 걸쳐 우리의 성냄과 분개는 차곡차곡 쌓인다.

 It’s time to clean out our closet. For most of us, there is a lot we need to get rid of. For example:

 Get rid of all bitterness, rage and anger, brawling and slander, along with every form of malice. (Eph. 4:31)

우리의 옷방을 말끔히 청소할 시간이다.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에게는 없애버릴 필요가 있는 많은 것들이 남아있다. 예를 들면, “모든 비통함과 (bitterness) 격렬한 분노와 (rage) 성냄과 요란함과 (brawling) 비방을  (slander) 모든 악의의 (malice) 모양과 함께 제거하라.” (엡 4:31).

Don’t you wish it was as easy as that verse makes it sound? But getting rid of bitterness and anger can be painful. It’s easier just to shut the closet door, pretend everything is fine, and open it only when absolutely necessary.

당신은 이 말씀처럼 그렇게 쉽게 할 수 있기를 원하지 않는가? 그러나 비통함과 분노를 버리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옷방의 문을 그저 닫고 모든 게 좋은 척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만 그 문을 여는 것이 더 쉽다.

In this section I want to invite you to clean out your closet and deal with some of the hurts other people have caused you. In my personal experience, and in my twenty-plus years as a pastor, I’ve discovered that extending grace and forgiveness to someone who doesn’t deserve it and  can’t make it right is more than a decision we make, it’s a journey we take.

이 부분에서  나는 당신이 옷방을 청소하고 타인이 당신에게 유발한 어떤 마음의 상처들을 처리하라고 초청하기를 원한다. 내 개인적 경험으로는 또 내가 목사로서 20년을 넘게 지나는 동안 나는 발견했다. 은혜와 용서를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또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없는 사람에게 은혜와 용서를 주는 것이 우리가 하는 결심 이상의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가는 여행이라는 것을.

                           은혜 여행을 시작하기
                     Beginning the Grace Journey

The first step is to decide it’s a journey you want to make or at least are willing to try. There is no magic grace button we can push that erases the painful memories or heals the festering wounds that others have caused us, but the difficult journey begins with a willingness to forgive even if forgiveness seems like too much to ask.

첫 걸음은 그것이 당신이 만들고 싶고 혹은 최소한 노력하기라도 원하는 여행이라고 작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르면 고통스런 기억들이 지워지고 남들이 내게 일으켜준 곪아가는 상처들을 치료하는 마술같은 은혜 버튼이란 없다. 그러나 그 어려운 여행은 용서를 구하기에는 너무 크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용서하려는 자발성과 함께 시작한다. (the difficult journey begins with a willingness to forgive even if forgiveness seems like too much to ask) 

For many of you who have been deeply hurt by someone else, it’s not that you want to continue living with those wounds or carrying the weight of that bitterness. It’s that giving grace doesn’t feel like an option. Maybe you would put it this way:
“I’ve been hurt too badly.”

다른 사람에 의하여 깊게 상처를 당해온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그 상처들을 가지고 살기를 계속하거나 그 비통함의 무게를 운반하기를 계속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은혜를 주는 것이 선택같이 느껴지지 않는 법이다. 아마 당신이 그것을 이런 식으로 적곤 할 것이다. “나는 너무 나쁘게 상처를 받고 지냈어.”

 I’ve heard many versions of that sentiment:
  “You don’t know what I’ve been through.”
  “Not after what she’s done to me.”
  “He has destroyed my life.”
  “It’s too painful to even think about.”

나는 그런 감정의 많은 표현들을 들었다.

   “당신은 내가 겪고 지낸 것을 몰라.”
   “그녀가 내게 한 것을 생각하면 절대 그럴 수 없어”
   “그는 내 인생을 망쳐놨어.”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것에 대해 생각조차 할 수 없어.”

Maybe that’s you. Maybe you’ve done that math and reached the conclusion that the hurt done to you is greater than the grace you are able to give.

아마 당신 이야기일 것이다. 아마 당신은 그 산수를 해냈고 당신이 당한 고통이 당신이 줄 수 있는 은혜보다 더 크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것이다.

A few days after I preached on this subject at church, I received an email from a lady who is now in her midfifties. She got married when she was nineteen years old to a man who was physically and verbally abusive. As she told me some of the horrors of her story, I found myself wishing for a baseball bat and five minutes alone with this man. She was married to him for twelve years before she finally escaped. For the several decades she had been consumed with bitterness, anger, and rage. Not because she wanted to be, but because after what she had been through, it seemed her only option. In her email she explained to me what she felt like as she listened to my sermon challenging her to open up her closet and deal with what was inside.

교회에서 이 제목으로 설교한 지 2, 3일 후에 나는 50대 중반의 한 여성에게서 이메일을 받았다. 그녀는 19살에 육체적으로 언어상으로 학대하는 남자에게 시집왔다. 그녀가 자기 이야기 중에 몇 가지 공포들을 내게 말했을 때 나는 야구방맹이를 가지고 이 남자와 단 둘이 있는 5분을 갖기를 원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가 마침내는 도망하기 전에 12년 간을 그와 살았다. 수 십년 동안 그녀는 비통함과 분노와 격렬한 분노로 기진하게 지냈다. 그가 그러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그가 겪고 지내온 것 때문에 도피는 그녀의 유일한 선택으로 보였다. 이메일에서 그녀는 내 설교를, 그녀의 옷방을 열고 그 안에 있는 것을 처리하라는 도전을 주는 설교를 들을 때 그가 느낀 것을 설명했다.

 

I wake up every day and feel like my hate for him is going to suffocate me. I never considered that anything other than 

that was possible, not after what he did to me. There was so much pain for so long that my bitterness left no room for 

even the possibility of grace. Because it seemed impossible I had never thought about whether I wanted to forgive him or not. As I listened to your sermon, I was overcome by the realization that I had never even tried to forgive. In fact, I had never even considered that God would want me to. I still don’t know if it’s possible, but I’m ready to at least try.

저는 매일 일어나면 그 남자를 향한 내 증오심이 나를 질식시킬 것 같이 느    낍니다. 저는 그것 말고 어떤 것이 가능한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     오랫동안 많은 고통이 있어서 내 비통함이 은혜를 줄 가능성조차 있을 공간    이 없습니다. 그게 불가능하게 보이기 때문에 저는 내가 그를 용서하기를 원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제가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 내가 용서하려는 시도조차 한 적이 없었구나라는 깨달음에 압도되었습니    다. 사실 저는 하나님이 제게 그렇게 하기를 원하실 거라고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게 가능한지 모르고 있으나 적어도 시도는 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That’s the first step of this journey: a willingness to forgive even it it doesn’t seem possible to make the equation work.

그게 이 여행의 첫걸음이다. 방정식이 성립되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게 보이지 않더라도 용서하려는 나의 자발성이 (willingness) 그러하다.

                             산수(算數)를 하라
                               Do the Math

In Matt. 18 Jesus tells the story of the unmerciful servant to help us understand not just the greatness of the grace we have received but the greatness of the grace we are to give. We discover in this parable that grace is only grace if it goes both ways. Grace is a two-way street. Receiving it from God but refusing to give it to others isn’t an option. Grace flows.

마태 18장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받은 은혜의 크기만이 아니라  우리가 주어야 하는 은혜의 크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무자비한 종의 이야기를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은혜가 양방으로 간다하더라도 은혜는 은혜일 뿐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은혜는 양방향의 도로가 있는 거리이다. (a two-way street). 하나님으로부터 받으나 남들에게 주기를 거부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은혜는 흐른다.

I’ll say it in a way that might make you more uncomfortable: the litmus test for the reality of grace you have received from God is extent to which you give grace and offer forgiveness to the person who’s hurt you the most and deserves it the least.

나는 당신을 더 불편하게 만들지 모르는 방식으로 그것을 말하겠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실재를 테스트하는 리트머스 검사는 당신이 은혜를 주고  당신을 많이 아프게 하고 적어도 그 용서를 받기에는 합당치 않은 사람에게 용서를 제공하는 그 범위인 것이다.

Peter comes to Jesus in Matt.18 with a question. It’s a generic question, but I bet there was a specific issue that motivated it: “Lord, how many times shall I forgive my brother or sister who sins against me? Up to seven times?” (Matt.18:21).

마 18장에 보면 베드로는 한 가지 질문을 가지고 예수께 온다. 그 질문은 일반적인 것이나 내가 장담하기로는 그 질문을 하게 만든 특별한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주님, 제게 죄를 짓는 형제나 자매를 얼마나 많이 용서해야할까요? 일곱 번까지면 될까요?” (마 18:21).

Peter presents a math problem, an equation to solve. Is grace greater than an offense that has been repeated over and over? It looks something like this:

베드로는 산수 문제를, 풀어야 할 방정식을 제시한다.  은혜는 몇 번이고 반복되어지는 죄보다 더 큰가? 그것은 이와같은 것을 보인다.

                              G >/< O x 7
         (G: grace (하나님의 은혜)  O: Offenses   7: 일곱 번)

How many times does Peter have to forgive a person who hurts him? He even makes a guess at the right answer, seven, and probably thinks he’s being very gracious. Jewish rabbis taught that you should forgive someone three times; the fourth time you didn’t have to forgive them. So when Peter throws out the number seven I imagine he’s expecting Jesus to commend his star pupil. “Peter, Seven times? That’s incredibly gracious. Why can’t all the disciples be like you!?”

베드로는 자기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얼마나 여러 번 용서해야만 하나? 그는 옳은 답이라고 추측하는 답을 만들기도 한다. 일곱 번.; 그러면 자기가 아주 은혜롭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유대의 랍비들은 세 번 용서해주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네 번째는 용서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7이란 숫자를 내놓았을 때 내가 상상하기로는 예수께서 자기를 수(首)제자로 (star pupil) 추천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으리라. 
“베드로, 일곱 번이라고?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은혜로운 일이오. 모든 제자들이 왜 당신 같을 수가 없을까!?”

Perhaps Peter had someone in mind when he asked this question. Maybe he thought he’d already been gracious enough with this person. After all, he had forgiven him or her somewhere around, I’m just guessing here . . . seven times. Someone had hurt him – not once, not twice, but seven times. Peter is ready to be done. He’s been hurt too badly, too many times.

아마도 베드로는 이 질문을 할 때 누군가를 마음에 두었을 것이다. 그는 그 사람에게 이미 충분히 은혜로웠다고 생각했으리라. 결국 그는 그를 어딘가에서 용서했다고 나는 추측하고 있다. 일곱 번. 누군가가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 한 번이 아니고, 두 번이 아니고, 일곱 번이나. 베드로는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는 너무 나쁘게 상처를 받았다. 너무 여러 번.

Perhaps for you it’s not a number of times but rather the degree of the offense. Maybe the person hurt you only one time, but the pain was times seven or even pain to the seventh power.

아마도 당신에게 그것은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 잘못의 정도일 것이다.  아마 그 사람은 당신에게 단 한 번 상처를 주었으나 그 고통은 일곱 배였거나 일곱 번째 위력에 해당하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We don’t know who Peter is talking about specifically, but I think it’s safe to assume he or she is someone he knows quite well. We’ll explore this more in a later chapter, but the truth is those closest to us are in a position to inflict the deepest wounds.

우리는 베드로가 특별히 누구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은 베드로가 아주 잘 아는 누군가라고 추정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다음 장에서 이 것을 더 탐구하겠으나 진실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이들이 가장 깊은 상처를 가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Last year, after I preached on forgiveness, I challenged people not just to forgive but to ask for forgiveness. After the service a man I didn’t know came to me to apologize to me for an email he had sent me a number of months earlier where he had, apparently, said some hurtful things to me. I could tell he genuinely felt bad and needed to tell me he was sorry. His apology was humble and heartfelt and I appreciated it. “I feel terrible and I’m sorry that my words hurt you,” he said. I  thanked him for that and forgave him, but I also said, “Hey, I’ve got good news for you. I’m only vaguely aware of what you’re talking about. I kind of remember getting the email you described. But bro – I went home that day, kissed my wife, played with my kids, slept like a baby, and didn’t think much more about it.”

작년에 내가 용서에 대한 설교를 한 후에 나는 사람들보고 용서하기만이 아니라 용서를 구하라고 도전했다. 예배 후에 내가 모르는 한 사람이 자기가 내게 보낸 이메일 때문에 사과하려고 내게 왔다. 그는 내게 그가 말한 바 내게 몇 가지 상처주는 말들을 몇 달 전에 이메일에서 했다는 것을 사과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순수하게 잘못이라고 느꼈고 미안하다고 내게 말하는 게 필요했다고 하는 말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의 사과는 겸손하고 마음에 닿았고 나는 그것을 인식했다.  “저는 두렵게 느껴졌고 제 말들이 당신을 아프게 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그 사과에 감사했고 그를 용서했으나 이렇게 말했다. “이보세요, 나는 당신을 위해 좋은 소식들을 가졌소.  나는 당신이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를 그저 애매하게 알았을 뿐이오. 나는 당신이 말한 바 그 이메일을 받은 것을 어느 정도 기억하오. 그러나 형제님, 저는 그 날 귀가하고 아내에게 키스하고 내 아이들과 함께 놀고 아기처럼 잠을 잤고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았다오.”

I wasn’t angry or bitter toward him. Why? Because I didn’t know him and he didn’t know me, and there’s no way I’m going to give someone who doesn’t even know me that kind of power over my life. Most often it’s the people we know the best and love the most who have the power to hurt us.

나는 그에게 화가 나거나 비통하지 않았다. 왜? 내가 그를 모르고 그가 나를 몰랐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에게 내 삶을 제압하는 그런 정도의 능력을 주려고 하는 방도가 없다. 나에게 상처를 줄 능력을 가진 자는 우리가 가장 잘 알고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람인 것이 흔하다.

There are exceptions, of course. You may have had someone come into your life just long enough to bring about life-altering devastation. But for most of us, the people we love most dearly are the people who have the power to hurt us most severely. The people we give our hearts to are the most likely to break them.

물론 예외가 있다. 당신의 삶을 바꾸는 황폐함을 불러오기에 충분히 길게 당신의 삶 안으로 들어오는 누군가를 당신은 가지고 지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가 가장 각별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극심하게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의 마음을 준 그 사람들이 우리의 마음을 가장 깨뜨리는 사람들이다. 

I’m convinced this is not a random theological question from Peter. There is a face and a story behind it. Maybe when you hear his question, a face comes to mind with a story you would do anything to forget but can’t help remember. And maybe Peter’s question is one you would like to ask too. “Yeah, Jesus, how far is too far? How much is too much? When is the hurt that has been done to me greater than the grace you want me to give? When does grace run out?” I don’t know what word you would choose to fill in the blank of the equation below, but maybe when you do the math this is the equation you come up with:

이것은 베드로로부터 나온 무작위의 신학적인 질문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되어진다. 그 이야기 뒤에는 사람의 얼굴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아마도 당신이 그의 질문을 들을 때 당신이 잊고 싶어 무언가를 하지만 기억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를 가진 한 얼굴이 마음에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아마 베드로의 질문은 당신도 묻고 싶은 질문일 것이다.  “예, 예수님, 너무 멀다는 것이 얼마나 먼 것인가요? 너무 많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것인가요? 내게 가해진 상처가 당신이 저보고 주라고 바라시는 은혜보다 더 클 때는 언제인가요? 언제 은혜가 바닥납니까?” 나는 당신이 아래의 방정식의 빈 칸에 채워넣으려고 선택하는 단어가 무언지를 모르지만 아마도 당신이 그 산수를 할 때 당신이 맞딱드리는 방정식이 이것일 것이다.

                         _____________ > 은혜 

Jesus answers Peter’s question, “I tell you,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v.22). Some translations say, “seventy times seven.” It’s not that Jesus is saying 77 times or even 490 times. He’s pointing to the chalkboard and saying, “Grace is always greater.”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하신다. “내가 말하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 하시오. (22절) 어떤 번역은 ”70 곱하기 7. 이라고 되어있다.  예수께서는 일흔 일곱 번 혹은 490번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 그분은 칠판을 가리키시면서 말씀하신다. “은혜는 언제나 더 크다.”

Let me pause here and acknowledge that some of you may be feeling a bit defensive. I don’t mean to sound dismissive. I don’t know what was done to you. I don’t understand the depth of the betrayal or the degree of pain you experienced. I don’t know the nightmares that wake you up at night. But I know this: grace is greater.

나는 거만하게 말하려는 의도가 없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당했는지 모른다. 나는 당신이 경험한 배신 혹은 고통의 정도를 모른다. 나는 당신을 밤에 깨우는 악몽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은혜가 더 크다는 것을.

Maybe you’re willing to accept this on some level intellectually. You want to believe grace is greater, but emotionally the equation just doesn’t work for you. The abuse or the abandonment was too painful, and as much as you want the remaining infection of bitterness gone, it just doesn’t feel like forgiveness is possible. My question is: Are you at least willing to try?

아마 당신은 어느 정도 지적인 수준에서 이것을 받아들이려고 할지 모른다.  당신은 은혜가 더 크다고 믿기를 원하지만 정서적으로 방정식은 당신을 위해 그저 작용하지 않는다. 학대나 버림은 너무 고통스럽고  당신이 그 나머지 그 비통의 전염이 지나가기를 원하는 만큼 용서가 가능한 것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내 질문은 이렇다. 당신은 적어도 해보려는 의지는 갖고 있는가?

                              받아들여진 은혜
                              Grace Received

Jesus understands how difficult this equation can be, so he tells a parable that helps motivate our willingness to try.

예수께서는 이 방정식이 얼마나 어려울 수 있는지 이해하신다. 그래서 그분은 시도해보려는 자발성에 동기를 부여하는데 도움되는 한 비유를 말씀하신다.

Therefore,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king who wanted to settle accounts with his servants. (Matt. 18:23)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그의 종들과 계산을 보기 원하는 한 왕과 같다. (마 18:23) 

We’re introduced to this high-powered CEO-type who decides it’s time to collect from those who owe him. He takes a look at the books, and we’re told that a man who owed “ten thousand bags of gold was brought to him” (v.24). I don’t  know how many bags of gold you have, but that’s a lot of gold. It’s roughly the equivalent of $150 million today. In Jesus’ day it might have been about ten times the national budget. It was an astronomical figure that probably had his audience chuckling. No master would ever loan this amount of money, and no servant would ever be able to pay it back. Jesus uses hyperbole here to make the point that this is a debt the man would never be able to repay.

우리는 자기에게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돈을 모아들일 시간을 결정하는 고도의 힘있는 전문경영인 형(型)의 사람을 소개받는다. 그는 장부들을 보고 그에게 일 만 달란트를 빚지고 있는 사람을 부른다. (v.24). 나는 당신이 얼마나 많은 돈을 갖고 있는지 모르나 그 돈은 아주 큰 돈이다.  오늘날로 치면 대략 1억 5천만 달러에 해당한다. 예수님의 시대에 그 돈은 국가 재정의 10배는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의 청중이 빙그레 웃을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어느 주인도 이 만큼의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고 어느 정도 그 돈을 갚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기 이 빚진 사람이 결코 되갚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과장법을 쓰신다.

Jesus continues,
Since he was not able to pay, the master ordered that he and his wife and his children and all that he had be sold
to repay the debt. (v.25)

예수께서 계속 말씀하신다. 
그 종은 갚을 수 없었기 때문에 주인이 그에게 그와 그의 아내와 자식들과     소유한 모든 것을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했다. (25절).

The master realizes this guy will never be able to pay him back, so he decides to auction off everything the debtor owns and to sell the debtor along with his family into slave labor. This wasn’t unfair. In fact, this kind of treatment was expected for any debt that could not be repaid.

그 주인은 이 자가 그 돈을 결코 갚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채무자가 자기는 물론 소유하는 모든 것을 경매에 내놓아야 한다고 작정하고 그의 가족도 노예 노동에 팔아야 한다고 작정한다. 이것은 불공평한 게 아니었다. 사실, 이런 식의 처리는 상환이 불가능한 빚에 예상되는 일이었다.

This parable is meant to reflect our standing with God. We are called in to give an account. He has been keeping track and we are all guilty. We have sinned and racked up a debt we can never repay.

이 비유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입장을 반영하려는 의도로 된 것이다. 우리는 계산을 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하나님은 기록을 해 오셨고 우리는 모두 죄가 있다. 우리는 범죄했고 우리가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 

You can live in denial and pretend you don’t owe God anything. You can justify the debt or dismiss it by comparing it to others. Or perhaps you accept that you owe a huge debt and decide you are somehow going to work it off. The problem is you can’t. The debt is too big. You owe too much. There is no amount of good deeds or benevolent acts that will somehow get you back to even. There is nothing you can say or do that will make things right.

당신은 부인하는 가운데 살 수 있고 당신이 하나님께 아무 것도 빚진 것이 없는 척할 수 있다. 당신은 그 빚을 정당화할 수 있고 그 빚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염두에 두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당신은 큰 빚을 진 것을 인정하고
어떻게든 일해서 갚으려고 작정하기도 한다. 문제는 당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빚은 너무 크다. 당신은 너무 많이 빚을 졌다. 당신이 부채가 없는 데로 되돌이킬 선행들이나 은혜를 베푸는 행위들의 총량이 없다. 당신이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서 말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다.

Jesus begins this parable with an image of God opening up his books and calling us in to give an account. It’s a reminder that apart from Jesus we are all in deep debt to God because of our sin.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그의 책들을 여시는 하나님의 이미지와 우리를 불러들여 계산을 하게 하시는 것과 함께 이 비유를 시작하신다.  예수님과 동떨어져서 우리는 모두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깊은 빚 안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비유이다.

Hebrew 4:13 teaches us, “Nothing in all creation is hidden from God’s sight. Everything is uncovered and laid bare before the eyes of him to whom we must give account.” Your teacher may not know you plagiarized the paper in college, but God knows. Your husband may not know about your flirting at the gym, but God saw it. You may have deleted the history on your computer, but God knows the websites you visit.

No one else may know about your drinking problem, but he knows. The windows on the house may be shut tightly enough that neighbors can’t hear you yelling, but God can hear it from heaven. The boss may not know about the embezzling, but God knows. He knows about all of it. He even knows about the pride some of you have right now because I couldn’t think of an example that applied to you.

히 4:13은 우리를 가르친다. “모든 피조물 안에 어떤 것도 하나님의 눈길로부터 숨겨질 수 없다. 만물이 공개되고 우리가 계산을 해야만 하는 그분의 눈앞에서 벌거벗겨진다.”  당신의 선생은 대학에서 당신이 표절했다는 것을 모를지 모르나 하나님은 아신다. 당신의 남편은 체육실에서 당신이 던치는 추파에 대해 모를지 모르나 하나님은 그것을 보셨다.  당신은 컴퓨터에서 역사를 지워버릴지 모르나 하나님은 당신이 방문하는 웹사이트들을 아신다.

아무도 당신의 음주 문제에 대해 모를지 모르나 하나님은 아신다. 집의 창문들은 이웃이 당신이 소리지른 것을 들을 수 없을 만큼 꽉 닫혀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들으신다. 당신 직장 대표는 횡령에 대한 알지 못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은 그것들 모든 것에 대해 아신다. 그분은 내가 당신에게 해당하는 예를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바로 지금 당신이 가진 어떤 교만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다.

The servant in Jesus’ story is confronted with this huge debt he owes and realized what he deserves.

예수님의 이야기 속의 그 종은 그가 진 거대한 빚과 대면했고  그가 받아야 하는 것을 깨달았다.

 

The servant fell on his knees before him. “Be patient with me,” he begged, “and I will pay back everything” (Matt.18:26)

The master knows that will never happen. There’s no chance this servant will ever be able to repay the debt. But incredibly the master takes pity on him, and in verse 27 Jesus tells us the master cancels the debt and lets him go.
There are two verbs used here. One is translated “cancel the debt” and the other is “let him go.” Both of these verbs could accurately be translated “to forgive.”
The servant owes $ 150 million but the master erases it from the books. It’s an incredible act of grace. The master doesn’t extend the note or lower the monthly payments. He completely deletes it from the record. As significant as the debt was, the master’s grace was greater.

그 종이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간정했다. “제게 좀 참아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모든 것을 갚겠습니다.” (마 18:26). 
그 주인은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안다. 이 종이 그 빚을 갚을 기회가 없다. 그러나 믿기지 않게 그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기고 27절에 보면 그 주인이 그 빚을 취소하고 그를 석방했다고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에 사용된 두 개의 동사가 있다. 하나는 “그 빚을 취소했다” 라는 동사이고 다른 것은 “그를 가게 했다”란 동사이다. 이 동사들 모두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용서하다”라는 동사이다.
그 종은 1억 5천만 달러를 빚지고 있으나 그 주인은 장부책들에서 그것을 지워버린다. 그것은 믿기 힘든 은혜의 행동이다. 그 주인은 그 기록을 연장하거나 월 지불액을 낮추지 않는다. 그는 완전히 기록에서 지워버린다. 그 부채가 의미있듯이 주인의 은혜가 더 크다.

                              은혜의 공동체
                           Community of Grace

Then this parable takes a disturbing turn.

그리고나서 이 비유가 충격적인 전환을 한다.

 

But when that servant went out, he found one of his fellow servants who owed him a hundred silver coins. He grabbed    him and began to choke him. “Pay back what you owe me!” he demanded. (v.28)
The servant who was forgiven a $ 150 million debt finds a coworker who owes him about 20 bucks. He begins to choke him and demand repayment.
His fellow servant fell to his knees and begged him, “Be patient with me, and I will pay it back.” (v.29)

그러나 그 종이 나갔을 때 그는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종들중의 한 사람을 보았다. 그는 그를 붙잡고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내게 진 빚을 갚으라.” 그가 요구했다. (28절)
1억 5천만 달라를 용서받은 그 종이 그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발견한다. 그는 그의 목을 조르면서 갚으라고 요구했다.
그의 동료가 무릎을 끓고 간청했다. “나를 참아주게. 그러면 갚겠네.” (29절)

That is exactly what the first servant had said to the master. Don’t miss this: he is being asked for the same grace he received, only to a much lesser degree.
If you’ve never heard this story, what do you think will happen?  Of course he’s going to forgive him. He was just forgiven a huge debt. Of course he’s going to show the same mercy. How could he not?
But he refused. Instead, he went off and had the man thrown into prison until he could pay the debt. (v.30)

그 말은 첫째 종이 그 주인에게 말했던 것과 정확하게 같다. 이것을 놓치지 말라. 그는 그가 받은 바 있는 동일한 은혜를 구하고 있었다. 훨씬 적은 정도의 돈 때문에.
당신이 만일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는 그를 용서할 예정이다. 그는 금방 엄청난 빚을 용서받았다. 물론 그는 동일한 자비를 보일 예정이다. 그가 그렇지 않을 수 있었겠나?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대신 그는 나가서 그 동료가 그 빚을 갚을 수 있을때까지 투옥시켰다. (30절)

The next detail in the story is easy to miss, but we can’t overlook what happens:
When the other servants saw what had happened, they were outraged and went and told their master everything that had happened. (v.31)

그 이야기에서 그 다음 세부적인 것은 놓치기 쉬우나 우리는 일어난 것을 간과할 수 없다.
다른 종들이 일어난 일을 보았을 때 그들은 격분하여 가서 그들의 주인에게 일어난 일을 말했다. (31절)

The “other servants” of the master are the ones who report the unforgiving servant to the master. They saw how much grace had been received and that this guy refused to give it, and they were outraged. Why? It was because they live in this community of grace together, with this master who doesn’t treat them as servants but as sons and daughters. They have a master who is known for extravagant benevolence. So when one of their own, who has been on the receiving end of this grace, refuses to give grace – the community is “outraged” or “very sad.” Outraged is also sometimes translated “greatly distressed” or “very sad.”

“다른 종들”이란 용서하지 않는 종을 주인에게 보고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첫째 종이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지를 보았고 이 자가 그 은혜를 주기를 거부한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들이 격분한 것이다. 왜? 그들이 은혜의 공동체 안에 함께 살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종들로 대우하지 않고 아들들과 딸들로서 대우하는 그 주인과 함께 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낭비적일 만큼 많은 자비로 알려진 주인을 모시고 있다. 그래서 그들 중 한 사람, 이 은혜를 받는 한쪽 끝에 있었던 그 종이  은혜를 주기를 거부할 때 그 공동체는 “격노했고” “아주 슬펐다.”  격노한다라는 것은 (Outraged) 종종 “크게 아파하는” 혹은 “아주 슬픈”으로도 번역된다.

That is an appropriate response when someone in a community violates the core value of the community.

이것은 (Outraged) 공동체 안의 어떤 사람이 그 공동체의 핵심 가치를 범할 때 (when someone in a community violates the core value of the community) 적합한 반응이다.

 

Think  about this a little more with me – the fellow servants become outraged when a member of their community doesn’t show grace, so they tell the master on him. Don’t miss this. In the middle of this story about grace, we find a lack of grace for the person who isn’t gracious.  

That  might seem counter-intuitive, but it’s not. It’s why we see Jesus extend radical grace to everyone he meets who is caught in sin except for the Pharisees whose sin was refusing to be gracious. If grace is the core value of a community, then that community just can’t ignore someone who refuses to be gracious.

나와 함께 이것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자. 그 동료 종들이  그들의 공동체의 한 멤버가 은혜를 보이지 않을 때 격노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그 종에 대해 주인에게 말한다. 이것을 놓치지 말자. 은혜에 관한 이 이야기의 중간에서 우리는 은혜롭지 않은 사람을 위한 은혜의 결핍을 본다. 그것은 반 직관적인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는 죄악에 붙잡혀 있는 그가 만나는 모든 자에게 중대한 은혜를 확장하시는 것을 우리가 보기 때문이다. 그들의 죄가 은혜롭기를 거부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제외하고서. 만일 은혜가 공동체의 핵심 가치라면 그 공동체는 그저 은혜롭기를 거부하는 어떤 사람을 못 본 척할 수는 없다.

Today the church is Jesus’ community. And as our leader demonstrated through his actions and reinforced with his teachings, our core value is grace. Our churches should be marked by grace, flooded with grace, known for grace. So when one of our own refuses to be gracious, there should be outrage and deep sadness.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의 공동체이다. 그리고 우리의 리더가 그의 행동들을 통해서 드러내주고 또 그의 가르침들로 강화시켰듯이 우리의 핵심 가치는 은혜이다. 우리 교회들은 은혜로 눈에 띄게 드러내지고 은혜로 홍수가 져야 하고 은혜 때문에 알려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 중의 한 사람이 은혜롭기를 거부할 때 격노와 깊은 슬픔이 있어야만 한다.

Here’s my concern: often the church is known for its outrage toward people outside of our community who need grace rather than outrage for the people inside our community who refuse to give it. When we sniff legalism in our community, or see someone who has received God’s incredible grace being judgmental and condemning toward those whose struggles are different than their own, we should become very distressed.

여기 내 관심이 있다. 자주 교회는 우리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을 (이들은  은혜를 주기를 거부하는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격노하기보다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인데) 향한 교회의 격분 때문에 알려진다. 우리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율법주의에 코방귀를 뀔 때나 하나님의 믿기지 않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의 투쟁은 교회 안의 사람들의 것과는 다른데) 판단적이고 정죄적인 것을 볼 때 우리는 아주 괴로워야만 한다.

Since grace is to be our most defining attribute, a person in a church who doesn’t live a grace-giving life should shock and grieve us. Picture someone who has given his life to a peacekeeping organization using his days off to plan terrorist bombings. This may be difficult to picture because it doesn’t make any sense. And if the people in one of those organizations discovered they had a member who was directly violating their core value, there would be total outrage. The person would be confronted and held accountable.

은혜가 우리의 가장 규정적인 속성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은혜를 주는 생활을 살지 않는 교회 안의 한 사람은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슬프게 함이 틀림없다.  자기 생명을 평화보존 기구에 바친 어떤 사람이 그의 날들을 테러분자들의 폭탄을 계획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을 그려보자. 그것은 타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그런 조직체들 중의 하나 안에서 그 사람이 그들의 핵심 가치를 직접적으로 범하고 있는 한 멤버를 두고 있음을 발견했다면 전적인 격노함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대면하게 되고 계산하게 될 것이다.

Look again at Heb. 12:15. “See to it that no one misses the grace of God and that no bitter root grows up to cause trouble and defile many” (NIV 1984). As a community we embrace extravagant grace and we do our best to make sure that no one misses it. And when someone in our community who has received it refuses to give it, we don’t just let that go.

다시 히 12:15을 보자.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를 잃지 않도록 주의하고 쓴 뿌리가 자라서 문제를 일으키고 많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라.” 공동체로서 우리는 풍부한 은혜를 포옹하고 아무도 그것을 잃지 않도록 확실히 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한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그것을 받은 어떤 사람이 그것을 주기를 거부할 때 우리는 그대로 놔두기만 해서는 안된다.

I’m afraid this is what’s happened to many people in the church over the years. Somehow, for some reason, they missed the grace of God and a bitter root began to grow – it creates a root of bitterness. In an earlier chapter I pointed out that in Hebrew culture any poisonous plant was called a “bitter” plant. This not-so-subtle metaphor is making the point that a Christian or church that misses grace is poisonous. A root may be small and it may grow slowly, but if it carries poison it is dangerous and can defile many.

나는 여러 해에 걸쳐서 이런 것이 교회 안에서 일어난 것을 두려워한다. 아무튼 몇 가지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잃었고 쓴 뿌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그것이 비통함의 뿌리를 만들어낸다. 앞의 장에서 나는 히브리 문화 안에서 어떤 독성 있는 식물이 “쓴” 식물이라고 불리어졌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 그리 교묘하지 않은 은유는 은혜를 잃는 한 기독인이나 교회가 독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뿌리는 작을지 모르나 그것이 천천히 자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독성을 전달하면 위험하게 되고 많은 사람을 더럽힐 수 있다.

                                한 손을 들라
                               Raise a Hand

I was on Facebook not long ago and stumbled across the page of a woman who had been a couple years ahead of me in high school. There’s a place on Facebook where you tell about yourself. You can put down your favorite movie, band, quote, and so forth. She had a quote from Gandhi: “I like your Christ. I don’t like your Christians. Your Christians are so unlike your Christ.” When I read that, it brought back a memory of when I was fifteen years old. She was probably seventeen and went to the same church I did.

It was a small church in a small town, so when she got pregnant it didn’t take long for the news to travel. She tried to keep coming to church, but as she began to show some of the parents started to complain that it was awkward for their kids, who really shouldn’t be exposed to that at church. It didn’t take long for her to get the message. She wasn’t welcome at church anymore. And a bitter root started to grow.

나는 오래지 않은 이전에 페이스북을 보고 고등학교에서 나보다 2년 선배였던 한 여인의 페이지를 우연히 만났다. (stumble across the page). 페이스북에는 당신이 자신에 대해 말하는 장소가 있다. 당신은 당신의 좋아하는 영화, 밴드, 인용문 등등을 적어놓을 수 있다.  그녀는 간디의 말을 인용했다.  “나는 당신의 그리스도를 좋아한다. 나는 당신의 기독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기독인들은 당신의 그리스도를 그리 닮지 않았다.” (I like your Christ, I don’t lke your Christians. Your Christians are so unlike your Christ.) 내가 그것을 읽었을 때 내가 열 다섯살일 때의 기억을 불러왔다. 그녀는 아마 열 일곱 살이었고 같은 교회에 다녔다.

그 교회는 작은 소읍의 작은 교회였고 그래서 그녀가 임신했을 때 그 소식이 퍼지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교회에 오려고 했지만 그녀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부모들 중의 어떤 이들이 자기들 자식들에게는 그것이 곤란한 일이라고 불평하기 시작했고 자기 아이들이 교회에서 그런 사실에 정말로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녀가 그 메시지를 받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교회에서 더 이상 환영하지 못했다. 그리고 쓴 뿌리가 자라기 시작했다.

The parents in that church were offended by her sin and her need for grace, but the real offense in that church was their unwillingness to give grace. Let me give you an example of how the church should respond.

그 교회에서 그 부모들은 그녀의 죄와 그녀의 은혜를 위한 필요에 기분이 상했으나 그 교회 안에서의 진정한 범죄는 은혜를 베풀기를 기꺼워하지 않은 것이었다. (unwillingness). 교회가 어떻게 이런 일에 반응해야 하는가에 대한 한 예를 제시하겠다.

I once heard a pastor named Jean Larroux talk about doing some work with a ministry called Love in Action, which is for people who are caught up in sexual addiction.1 Jean tells about sitting in on one of the group meetings  

나는 언젠가 쟌 래룩스 (Jean Larroux)라는 이름의 한 목사가 행동하는 사랑 (Love in Action)이라고 불리는 사역과 함께 몇 가지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사역은 성적인 중독에 걸린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1
                                 footnote
1 Jean Larroux, “Why Bad People Make Good Missionaries,” sermon given at Coral Ridge Presbyterian Church, Sept.2014.

 1 Jean Larroux, “나쁜 사람들이 왜 좋은 선교사들을 만드는가,” 코랄 릿지 장로교회에서 2014년 9월에 한 설교. 

I once heard a pastor named Jean Larroux talk about doing some work with a ministry called Love in Action, which is for people who are caught up in sexual addiction.1 Jean tells about sitting in on one of the group meetings. He had never been to something like this and wasn’t sure what to expect. There was a good-sized group of men who gathered together. One went to the front to share his story and talked about driving home from work and passing an adult nightclub. “I really wanted to stop,” he said. When he said this a bunch of hands went up in the air. Jean didn’t know what was happening. He thought, Who would ask a question during a story like this? The guy continued his story, “I didn’t want to . . . but I pulled into the parking lot and went in.” Again some of the guys in the crowd raised their hands. The man went on, “I spent the evening there . . .” and he confessed some of what he did, and again some hands went up. He said, “When I left, I felt so ashamed. I didn’t think God could love me.”

쟌 목사는 그룹 모임의 하나에 방청(참관)한 것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이같은 곳에 가본 적이 없었고 무엇을 기대할지 확신이 없었다. 함께 모인 남자들로 된 제법 크기가 있는 그룹이 있었다.  한 사람이 자기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서 직장에서 귀가하려고 운전하는 중에 한 성인 나이트클럽을 지나가고 있던 것에 대해 말했다. “나는 정말로 멈추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그가 말할 때 다수의 손들이 위로 올라갔다. 쟌 목사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 그는 생각하기를, 이같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 누가 질문을 하려고 그랬나 라고 생각했다. 그 남자는 계속 말했다. “나는 원하지 않았죠 ... 그러나 주차장에 들어가고 클럽에 들어갔습니다.” 또 다시 몇 남자들이 그들의 손을 들어올렸다. 그 남자는 계속 말했다. “나는 그 저녁을 거기서 보냈어요. . .” 그리고 그는 자기가 한 일의 몇 가지를 고백했다. 또다시 몇 사람의 손들이 올라갔다. 그가 말했다. “내가 거기를 떠났을 때 나는 수치를 느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이런 나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어요.”

At this point almost every hand in the crowd except for Jean’s went up in the air. He couldn’t figure out what all the questions were about, and for that matter why none of the questions were being asked or answered. The director stopped to speak with him afterward. “You look troubled,” he said. Jean admitted, “I am troubled. Why were there so many questions? And why didn’t anyone try to answer them?”

이 시점에서 쟌 목사의 손 외에 그 무리 안의 거의 모든 손이 공중으로 올라갔다. 그는 모든 질문들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왜 아무 질문도 없고 대답도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디렉터는 나중에 그와 말하기를 중단했다. “당신은 곤란을 겪고 있는 듯 보이네요.” 그가 말했다.  쟌 목사는 자백했다. “나는 곤란했다. 왜 그리 많은 질문들이 있었나? 그리고 왜 아무도 그 질문들에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나?”

The director said, “Oh, no, you don’t understand. We have one rule at Love in Action – you never struggle alone. So if you have ever struggled with the same thing that someone else is confessing, you have to raise your hand.”

그 디렉터는 말했다. “아, 아니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우리는 행동하는 사랑 모임에서 한 가지 규칙이 있답니다. 그것은 ‘당신은 혼자서 투쟁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당신이 다른 어떤 사람이 고백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것과 투쟁한 적이 있다면 당신은 손을 들어올려야 합니다.”

That needs to happen in churches, so no one misses the grace of God. People need us to raise a hand, not point a finger. They need to hear, “Me too. I’m broken too.” That’s the only response that makes sense in a community of grace filled with people who have to rely on forgiveness to get in. I realize it may seem out of place to call for outrage in a book about grace, but outrage is appropriate when someone violates the core value of a community.

그런 것이 교회 안에서 일어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를 잃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손을 들어올리기를 필요로 합니다. 누구에게 비난하는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not point a finger). 그들은 들을 필요가 있다. “나도 그래요. 나 역시 망가졌습니다.” 라는 말을. 그것이야 말로 용납되기 위해서 용서에 의존해야만 하는 사람들로 채워진 은혜의 공동체 안에서 타당한 유일한 반응이다. (That’s the only response that makes sense in a community of grace filled with people who have to rely on forgiveness to get in.) 나는 은혜에 관한 책에서 격노함을 주장하는 것이 적절치 않게 보인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누군가가 한 공동체의 핵심 가치를 범할 때 격노함은 적절하다.

Some of you have been choked by someone in the community who wanted to receive grace from the Master but refused to give it to you. So for those of you who have grown up in a community that violated this core value, I want to take a moment on behalf of the community to apologize. I actually have a list here, if you’ll bear with me:

여러분 중의 어떤 이들은 공동체 안의 어떤 사람, 그가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기를 원하지만 그것을 당신에게 주기를 거부하는 사람에 의해 목이 졸리면서 지내왔다. 그래서 이 핵심 가치를 범하는 공동체 안에서 성장해온 당신을 위해 나는 그 공동체를 대신하여 사과하는 순간을 가지고 싶다. 당신이 나를 참아줄 것이면 나는 실제로 여기에 목록을 갖고 있다.

 

   To the pregnant young lady who graduated a few years ahead of me: I am sorry.
   To the man who was told he wasn’t allowed to be part of the community because of a divorce in his past:

      I am sorry.
   To the parolee who opened up about his past mistakes and was told he was no longer welcome: I am sorry.
   To the woman from the adult industry who became a part of the community in need of a hug but instead 

      got judgmental stares: I am sorry.
   To the addict who finally was honest about his addiction but instead of support was offered shame: I am sorry.
   To the . . . 


   나보다 2, 3년 앞서 졸업한 그 임신한 젊은 여성에게:  미안합니다.
   그의 과거에 이혼한 것 때문에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게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그 남자에게:  미안합니다.
   그의 과거 잘못들에 대해서 공개한 가석방자, 그가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그에게:  미안합니다.
   성인 향락 산업으로부터 나온 한 여인, 환영의 얼싸안음이 필요하여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지만 얼싸안음이 아니라

      판단하는 시선들을 받은 여인에게:  미안합니다.
   자기의 중독에 대해 마침내 솔직해졌으나 지지 대신에 수치를 당한 중독자에게:  미안합니다.
   그 외에 . . . 에게 :  미안합니다.

When someone in our community wants to receive grace from the Master but refuses to even attempt to give grace to someone who has hurt them, the community should be outraged and saddened.

우리 공동체 안에서 어떤 사람이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기를 원하지만 그들을 아프게 한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주려는 시도조차 거절할 때 그 공동체는 격렬한 화가 나야 하고 슬퍼져야 한다.

                               새로운 방정식
                            The New Equation

And so, the master finds out that this guy who had received incredible grace was refusing to give it.

그래서 그 주인은 이 자가 믿기지 않는 은혜를 받았는데도 그것을 주기를 거절하고 있은 것을 안다.

Then the master called the servant in. “You wicked servant,” he said, “I canceled all that debt of yours because you        begged me to. Shouldn’t you have had mercy on your fellow servant just as I had on you?” In anger his master handed    him over to the jailors to be tortured, until he should pay back all he owed. (Matt. 18:32-34).

그 때 그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였다. “너 악한 종아, 나는 네가 간청하기 때문에 너의 모든 빚을 탕감해주었다. 너는 내가 너에게 한 것과 똑같이 네    동료 종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는가?” 그 주인은 분노하여 그를 간    수들에게 넘겨주어 괴롭힘을 당하게 했다. 그가 진 모든 빚을 갚아야만 할때까지. (마 18:32-34)

I’m thinking that’s going to take a long time. How long is it going to take him to earn $ 150 million in prison. How about . . I’m just guessing here . . . forever? He’s never going to pay it back. He’s going to spend the rest of his existence in a cell, imprisoned by his unwillingness to give grace and shackled by the overwhelming guilt of what he’s done. Do you know what that’s called?  It’s called hell.

나는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가 감옥 안에서 1억 5천만 불을 버는 데는 얼마나 걸리겠는가. 나는 그저 여기서 추측하는건데 영원히 가능할까? 그는 그것을 결코 갚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은혜를 주려고 하지 않음 때문에 옥 안에 갇히고, 그가 한 짓에 대해 휘덮는 죄책감에 의해서 착고에 채워져서 그의 존재의 나머지를 보낼 것이다. 당신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불리우는지 아는가? 그것은 지옥이라고 불리운다.

Oftentimes when Jesus tells a parable, the takeaway is a little vague. Sometimes he leaves it hanging for people, prompting them to ponder the meaning and implications. Sometimes it’s a little ambiguous, but not here. Jesus ends this parable with this warning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그 요점이 자주 모호하다. 종종 그는 그 요점을 사람들을 위해 그냥 남겨두시고 그들이 그 의미와 함축된 뜻을 곰곰이 생각하게 촉구하신다. 종종 그것은 모호하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이 경고로 끝내신다.

This is how my heavenly Father will treat each of you unless you forgive your brother or sister from your heart. (v.35)

이것이 내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들이 마음으로부터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지    않을 때 당신들 하나하나를 대하실 방식이다. (35절)

I know some of you immediately push back on that. “What? You’re telling me that if I don’t forgive the person who hurt me, who abused me, who betrayed me, who cheated me, who abandoned me, God won’t forgive me?” No, I’m not saying that. I’m just telling you what Jesus said.

나는 당신들 중 어떤 이들이 즉각 그것을 반격할 것을 (push back on that) 안다. “무어라고? 당신은 나에게 내가 만일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 나를 학대하고 나를 배신한 사람, 나를 속인 그 사람, 나를 버린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소?” 아니. 나는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나는 그저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를 당신에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This wasn’t the only time Jesus issued such a warning. In Matt. 6:14-15 he said, “For if you forgive other people when they sin against you, your heavenly Father will also forgive you. But if you do not forgive others their sins, your Father will not forgive your sins.”

이것은 예수께서 이런 경고를 발하신 유일한 때가 아니다. 마 6:14-15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당신이 그들이 당신을 대하여 범죄할 때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당신의 하늘 아버지 또한 당신을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타인들에게 그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하늘 아버지도 당신의 죄들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Jesus made it clear that you can’t receive God’s grace and then refuse to give it to others. If God’s forgiven your sins, you can’t continue keeping track of the sins of others. If you do, if you hold on to the bitterness, your hurt will become hatred. It will poison you, and the infection will spread, and the not-so-subtle insinuation is that it could lead you to miss out on grace altogether. So instead of holding on to the bitterness of what was done to you, hold it up, realize it’s not sparking joy, and get rid of it.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기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만드셨다. 만일 하나님이 당신의 죄들을 용서하셨다면 당신은 남들의 죄악들을 계속 추적할 수 없다 (can’t continue keeping track of the sins of others).  만일 당신이 그리하면 만일 당신이 그 비통함에 계속 매달리면 당시니의 아픔은 증오가 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을 중독시키고 그 전염이 퍼질 것이다. 그리고 그리 교묘하지 않은 암시는 그것이 당신이 은혜를 온통 잃는 쪽으로 당신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당한 것의 비통함에 매어달리는 대신에 그 비통을 중지하고 그것이 당신에게 기쁨을 발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제거하라.

I know it’s not simple; it’s a journey, but the journey begins with a willingness to take the first step.

나는 그것이 단순치 않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여행이다. 그러나 그 여행은 첫 걸음을 떼려는 자발성과 함께 시작한다.

I know it’s not fair. That person hurt you. They owe you something. Maybe they owe you a childhood. Or a marriage. Or a lot of money. Or at least an explanation.

나는 그것이 공평치 않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당신을 아프게 한다. 그들은 당신에게 무언가를 빚지고 있다. 아마 그들은 당신에게 어린 시절을 빚지고 있다. 혹은 결혼을 빚지고 있다. 혹은 많은 돈을. 혹은 적어도 설명을 빚지고 있다.

It’s not fair to let it go. It’s grace. And you’ll never be asked to give more grace than you’ve already received. That’s what we learn in this parable.

그것이 그냥 지나가게 하는 것은 공평치 않다. 그것은 은혜이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이미 받은 것보다 더 많은 은혜를 주라고 요구받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이 비유에서 배우는 것이다.

Jesus answers Peter’s equation with an equation of his own. Jesus’ equation looks like this: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방정식에 그분 자신의 방정식으로 대답하신다. 예수님의 방정식은 이같은 것으로 보인다.

                        $ 150,000,000 > $ 20
                      (한 달란트 > 100 데나리온)

In other words, the grace you have received is greater than the grace you are being asked to give.

환언하면, 당신이 받은 은혜가 당신이 주도록 요구받고 있는 은혜보다 더 크다.

I hope you don’t think I’m minimizing the offense of what you have to forgive. I’m not. Neither is Jesus. I realize you may have had horrible things done to you. My heart breaks trying to imagine it. I am not making light of it. I am saying that the more you understand the holiness of God and the more you understand yourself, the more you will realize how true this is. 

내가 당신이 용서해야만 하는 것의 죄를 최소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그렇지 않다. 예수님도 그렇지 않다. 나는 당신이 당신에게 행해진 끔찍한 것들을 가졌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내 마음은 그것을 상상해보려고 하면서 깨어진다. 나는 그것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 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해할수록, 그리고 당신 자신을 더욱 이해할수록 당신은 더 많이 이것이 얼마나 진실한지를 깨달을 것이다.

When the gospel sinks in, it changes your equations.

복음이 충분히 이해될 때 그것은 당신의 방정식들을 바꾼다.

                        그것을 은혜라고 부르지 말라
                           Don’t Call it Grace

I grew up being taught that if I hurt someone, if I was disrespectful or disobedient, my job was to “make it right.” I needed to say or do something to make it right with that person. It’s a good lesson to teach kids. But it developed into an unbiblical approach to forgiveness and grace, because I came to this conclusion: when someone hurts me, forgiveness happens when the person who hurt me makes it right. When they say or do something to make things right, I will forgive them. The problem is that this is not grace.

나는 이런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다. 만일 내가 누구를 아프게 했다면, 내가 만일 불경하고 불순종했다면 내 일은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람과의 일을 바로 잡기 위하여 무언가를 말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것은 좋은 교훈이다. 그러나 그것은 용서와 은혜에 비성경적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것은 성경적 접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아프게 할 때 나를 아프게 한 그 사람이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하면 용서가 일어난다. 그들이 문제들을 바로 잡으려고 말하고 무언가를 할 때 나는 그들을 용서할 것이다. 문제는 이것은 은혜가 아니라는 것이다.

Besides, what do you do when you are hurt so badly nothing can be said or done to make it right? What do you do then? Some of you know exactly what I mean. You’ve been hurt badly enough that you are painfully aware there is nothing they could say and nothing they could do to make things right.

그 외에 당신이 그렇게 나쁘게 상처받을 때 그것을 바르게 만들기 위해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하고 아무런 것도 당신에게 행해지지 않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그러면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여러분 중 어떤 이는 내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안다.  당신은 충분히 상처를 받아와서 그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나는 것을 고통스럽게 안다. 일을 바로 잡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That was exactly the position you were in with God when he extended his grace to you through Jesus. You could do nothing. You could say nothing. When there was no possibility of you making it right. God gave his only son.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에게 그의 은혜를 끼쳐주실 때 당신이 하나님과 함께 거기 있는 위치인 것이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을 바르게 만드는 것의 가능성이 없을 때 하나님은 그의 유일한 아들을 주셨다. (You could do nothing. You could say nothing. When there was no possibility of you making it right, God gave his only son.)

Jesus said the master canceled the debt. He didn’t just extend the note or make it interest-only, he erased it completely. That’s what God has done for us. It’s not earned. When you make grace dependent on the actions of the person who hurt you, you need to find a different word because it’s not grace. With grace, the person doesn’t fix the consequences of their sin; you take the consequences of their sin. That’s not fair. It’s not right. But it is exactly what Jesus did for you.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 주인이 그 빚을 탕감했다고. 그는 그저 기록을 연장하거나 이자만을 만들지 않고 그 빚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벌어들인 것이 아니다. 당신이 은혜를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의 행동들에 의존케 만들 때 당신은 그것이 은혜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단어를 찾을 필요가 있다.  은혜에 관한 한 사람은 그들의 죄의 결과들을 남에게 지우지 않는다. 당신은 그들의 죄의 결과들을 붙잡는다. 그것은 공평치 않다. 그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예수께서 당신을 위해서 하신 것이다.

                          당신을 위해 > 당신에게
                           For You > To You
              (당신을 위해서 하나님이 해주신 것이 누군가가 
                     당신에게 상처준 것보다 더 크다)

So are you willing to at least open the closet door and look inside? You don’t have to, but what’s the alternative? You can let the root of bitterness continue to grow. You can continue to make her pay every penny she owes. But ultimately you’re the one who will pay the price for your refusal to forgive.

그러므로 당신은 기꺼이 적어도 옷방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보려는가? 당신은 그럴 필요가 없으나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비통의 뿌리가 계속 자라게 시킬 수 있다. 당신은 그녀로 하여금 빚진 마지막 푼돈까지 지불하게 만들기를 계속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당신은 용서하기를 거절하기 때문에 그 값을 지불해야할 사람이다. 

In this story, the servant who was forgiven a debt of $ 150 million refused to forgive the debt of the guy who owed him 20 bucks and had him thrown in prison. What’s interesting is that in the ancient world, the person who would have paid for that guy to be put in prison would have been . . . are you ready for this? The person he owed the money to. Instead of forgiving the twenty-dollar debt, he paid for the guy to be punished. Not only did refusing to forgive not get him back what he was owed but it ended up costing him even more. That’s how it worked back then.

이 이야기에서 그 종은 1억 5천만 불의 빚을 용서받았는데도 그에게 20 달러의 빚을 진 사람의 부채를 용서하기를 거절하고 그를 투옥시켰다. 흥미로운 것은 고대사회에서 그 동료가 투옥되게 하기 위해 돈을 지불했을 그 사람은 -  이것을 인정할 준비가 되었는가? - 그 돈을 받을 사람이었을 것이다. 100 데나리온의 빚을 용서하는 대신 그는 그 동료가 처벌받게 하기 위해서 돈을 지불했다. 용서하기를 거절한 그 자는 그가 받을 돈을 돌려받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많은 돈을 지불함으로 끝이 났다. 그것은 그 당시 초과 근무하는 것에 대한 처리 방식이었다. 

And that’s still how it works. If you refuse to forgive and keep the person who sinned against you locked in a prison of your bitterness, guess who’s paying? You are. You’re the one losing sleep. You’re the one whose stomach hurts. You’re the one whose relationships are being infected by bitterness. You’re the one whose closet is a wreck.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작용하는 방식이다. 만일 당신이 용서하기를 거부하고  당신에게 죄지은 사람을 당신의 비통함의 감옥 안에 가두어 놓으면 누가 지불하고 있다고 추측하는가? 당신이다.  당신이 잠을 잃고 있는 사람이다. 당신이 위장이 아픈 사람이다. 당신이 인간관계가 비통함으로 전염되고 있는 당사자이다. 당신의 옷방을 난파선으로 만든 사람이 바로 당신이다.

The master has canceled our debt, and it is time for us to let that grace flow. It’s not easy, but with God it is possible.

주인은 우리의 빚을 탕감했다. 그리고 지금이 우리가 그 은혜가 흐르게 만들 시간이다. 그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것이 가능하다. (but with God it is possible).

Here’s where I want to ask you to begin: stop thinking about what’s been done to you, and start thinking about what’s been done for you.

여기가 내가 당신에게 시작하라고 요청하는 자리이다. 당신이 당한 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중단하라.  그리고 당신을 위해 되어진 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시작하라.

Every time the pain of what’s been done to you gets triggered, intentionally start thinking about what God has done for you. Because what’s been done for you is greater than what’s been done to you.

당신이 당한 것의 고통이 작동될 때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해주신 것에 대한 생각을 시작하라. 당신을 위해 되어진 것이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해주신 것이) 당신에게 되어진 것보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상처를 준 것보다) 크기 때문이다.

'Lecture scripts (한글 강의록) > 은혜가 더 크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Grace is greater Ch.5.  (3) 2024.12.20
Grace is greater Ch.10.  (2) 2024.12.17
Grace is greater Ch.3.  (4) 2024.11.26
Grace is greater Ch.2.  (2) 2024.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