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의 자녀들이 축복의 문화 속에서 성장하기를 원하고 계시다.
(God wants children to grow up in a culture of blessing.)
당신은 축복의 문화란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궁금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말하자면 가정의 구성원들이 (특히 부모가) 정기적으로 사탄의 무가치한 메시지보다는 가치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자식들에게 전달하는 그런 환경을 말하는 것이다. 축복의 문화 속에서 가정 구성원들은 다른 가족들의 삶 위에 염산이 아니라 살아있는 식물 위에 규칙적으로 비료를 부어주는 것을 말한다. 서로의 성장을 보려고.
서로를 축복하는 가정 안에서 어떤 가족이 무심결에 혹은 고의적으로 다른 가족의 identity를 (그의 정체성, 신분, 독자성: Craig 는 이 아이덴티티를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그의 독자적인 신분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가 누구인가 - who he is 에 관련된 것이라고 규정한다) 저주했을 때 그 잘못이 깨달아지는 순간 그 사람은 회개하고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바로 잡아놓게 된다. 축복의 문화 안에서 가족들은 서로가 축복을 위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는 책임이 있다고 여기게 된다. (hold one another accountable to be God’s agents of blessing).
세계 각처에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축복의 풍습, 의식 儀式, 문화를 갖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히 유대인 가정에 매주 가정에서 축복을 하는 놀라운 전통을 세워주셨는데 오늘날까지도 실행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매주 금요일 저녁 가족이 함께 모여 특별한 저녁 식사를 하고 축복을 선포하는 전통인 것이다. (히브리어로 에레브 샤바트).
매주 금요일 저녁 이 시간 가장이 되는 아버지는 그의 아내에게 축복의 기도를 하고 자기의 자녀들 각각에게 축복을 선언한다. 또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에게 비젼과 번영을 선포한다.
(the father also proclaims vision and prosperity over his children)
그리하여 그의 자손들 속에 미래의 성공의 기대를 만들어 낸다.
(thus creating in his offspring an expectation of future success).
이같이 함으로써 –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든지 모르든지 – 자녀들의 생각과 마음 속에 그 자녀들 각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자아상과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통해 이루실 일 (그 자녀가 살아가면서 해야할 일에 대한 사명감, 책임감)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impart: convey 와 같은 뜻으로 정보를 주다, 알려주다, 특성을 주다)
아버지가 이렇게 축복해주는 전통에서 그 말씀들은 예언적이 되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 자녀들은 그의 아버지가 매주 선포한 (예언한) 바를 정확하게 성취하게 된다.
번역자 해설: 아버지의 축복이 예언적이 된다는 것은 자녀들의 형통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축복의 말을 한 것이고 자녀들은 그 축복의 말씀들을 매주 들으면서 성장하면서 그 축복의 말씀이 자기의 인격을 <identity> 만들어내고 그 말씀한 바가 자기의 사명 <destiny>이라고 확신하면서 마침내는 어느 순간 성취하게 되니까 예언적이라고 <prophetic> 표현한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면 하나님이 원하는 인격의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저 하는 일을 이루어내게 되는 것 아닌가!)
저자가 이 책의 제목을 “The Power of a Parent’s Blessing” 이라고 정한 것의 의도를 이 섹션만 읽고도 이해가 간다. 제2장의 제목이 “Creating a Family Culture of Blessing” 인데 우리 부모된 이들은 (크리스챤으로서) 이런 문화의 중요성과 시급함을 얼마나 느꼈는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저는 (김상인 목사) 이 책이 가정혁신, 가정부흥, 가정회복의 길잡이라고 매료되면서 이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은 강렬한 의욕을 갖게 되었다.
통제 對 권위 (Control vs. Authority)
매 주 부모가 가정에서 축복의 분위기를 세우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기 위하여 부모는 자기 자녀들의 정체성 (신분, 자아상)을 그들의 행위와 구분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특히나 자녀들을 훈련시킬 필요가 생길 때 이것이 중요하다.
(to separate their children’s identity from their behavior).
나는 (Craig Hill) 주님이 내게 처음 보여주신 그 때를 기억하는데 나는 내 아들을 훈련시킬 필요를 느꼈을 때 축복하기보다는 막 저주하려는 것을 보여주셨다. 내 막내아들 죠나단이 네 살이었고 나는 막 목사의 사역을 시작한 해였다. 은혜로운 예배를 훌륭하게 마치고 현관 입구로 걸어갔는데 내 아들의 주일학교 교사가 죠나단과 함께 거기 서 있었다.
그 교사가 인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오늘 아침 주일학교 반에서 요나단과 관련하여 작은 문제가 있었어요. 제가 죠나단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청했는데 이 애가 ‘안 할래요’ 라고 말해서 다시 요청했는데 또 ‘안 할래요’ 라고 말하고 제게 아주 터무니없는(외설스런 obscene) 이름을 붙였어요. 우리 반에서 이 문제를 처리했지만 목사이신 아버지가 그것을 알려고 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내 얼굴이 세 번 붉어짐을 느꼈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죠나단이 내게 이럴 수가 있을까? 그 교사는 내 아들의 상소리를 듣고 우리 식구들이 이런 식으로 말하며 산다고 생각할 것 아닌가.” 나는 즉시 딤전 3:5을 생각했는데 교회의 목회자들과 장로들에게 요구되는 것에 관한 말씀이다. “만일 사람이 자기 가정을 이끄는 방법을 모른다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겠는가?” “If a man does not know how to manage his own household, how will he take care of the church of God?” 나는 ‘내 목회가 끝났다. 내 아들은 통제 불능이고 나는 사직을 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내 수치감은 곧바로 분노로 바뀌었다. “바로 여기서, 바로 지금, 죠나단의 엉덩이를 때려주고 이 교사에게 나는 좋은 아버지이고 내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겠다.”
그러나 내가 죠나단을 향해 갈 때 성령님께서 나를 멈추게 하시고 내게 물으셨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제 아들을 훈련하려고 합니다.” “아니야, 너는 아들을 훈련하는 게 아니라 사탄의 대리자가 되어 죠나단의 신분(인격 identity)을 저주하려고 하고 있어.” “무엇이라고요? 아닙니다. 그 애는 나쁜 짓을 했고 훈련 받을 필요가 있어요. 저는 그의 아비로서 지명받았고 그 훈련을 하게 대리자로 기름부음을 받았어요.”
주님이 그 때 내게 말씀하셨다. “맞아. 그러나 이 특별한 순간 너는 그럴 자격이 되어있지 않아.” “자격이 없다고요? 왜요?” 나는 따졌다.
그때 주님이 내게 마 7:3을 생각나게 하셨다. 요약하면 “네가 너의 형제의 눈에서 티끌을 빼내기 전에 네 눈에서 기둥을 빼내거라. 네가 네 눈 안에 이런 커다란 기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너는 분명하게 볼 수 없어서 네 아들의 눈에서 티끌을 빼낼 수 없단다. 너는 네 아들의 유익을 위해서 훈련하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네 마음은 분노로 차서 그 교사 앞에서 너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또 너를 당황시킨 것 때문에 네 아들에게 분노를 발산하기 위하여, 네 아들을 훈련하기를 바라는 거야.”
주님은 계속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비로서 실패했다고 느꼈기 때문에 네 작은 아들에게 너의 모든 좌절을 발산하려고 하고 너의 분노를 통해서 네가 느끼는 것보다 더 나쁘게 네 아들이 느끼게 하려는 거야. 너는 네 아들에게 마귀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고 있다. 사탄의 반 복음적인 (anti-gospel) 메시지는 사람의 가치를 실적(성과)과 연관지으려고 하나 내 복음은 그와 달리 사람의 가치를 실적과 연관시키지 않는단다. 사탄의 반(反)복음은 이렇게 말하지. ‘만일 네가 순종하고 옳게 행하면 나는 너를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겨주고 축복한다. 그러나 네가 불순종하고 그릇 행하면 나는 사랑을 주지 않고 너희 가치를 빼앗고 너를 저주한단다.’ 너는 네 아들의 인격을 저주하려고 했다. 그가 불순한 말을 했고 너를 당황하게 했으니까. 내 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네가 순종하고 옳게 행하면 나는 너를 사랑하고, 가치를 인정하고 축복하겠다. 아무튼 만일 네가 불순종하고 그릇 행한다면 나는 여전히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고 복을 내리겠다. 그러나 나는 또한 너의 잘못된 선택에 합당한 결과로써 너의 행위를 훈련하겠다. 그럼에도 너를 위한 내 사랑과 소중히 여김은 네가 무엇을 하든 결코 변하지 않는단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바 네가 네 아들에게 전하기를 바라는 나의 메시지란다.”
이것은 내게 깜짝 놀랄 계시였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주님께 내가 여쭈었다. “제가 왜 아들에게 그렇게도 당황하고 분노했지요?”
나는 주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을 즉각 들었다. “아들아, 너는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또 내 눈에 네가 소중함은 너의 성과(실적)에 의존치 않는다는 것을 여전히 믿지 않기 때문이야. 너는 소중히 여겨지기 위하여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야만 했고 지금 너는 그런 거짓말(진리가 아닌 것)을 네 아들에게까지 뻗쳤던 거야. 네 아들이 범죄하고 잘못을 한다면 너는 네가 무가치한 아비처럼 느낄 것이고 너를 불명예스럽게 한 것 때문에 꾸짖으려는 거야. 그러니까 사실 너의 정서적인 안녕은 네 살배기 아들의 행위에 지금 의존하고 있는 거야. 타인의 정서적인 안녕을 위한 책임감은 어른에게 올려놓는 제법 무거운 짐이 되곤 한단다. 그러나 너의 정서적인 안정감을 위해서 네 살배기 아이가 책임을 지게 만드는 것은 그 아이에게 전적으로 공평하지 않단다. 만일 그가 바르게 행동한다면 너는 그를 소중하게 느끼고 정서적으로 만족하겠지. 그러나 만일 그가 잘못 행동한다면 너는 그가 무가치하고 너는 화가 난다고 느낄 것이고 그런 감정들 때문에 네 아들을 나무라고 그의 인격을 저주하고 네가 느끼는 것보다 너 나쁘게 그 아이가 느끼게 만들겠지. 그렇게 함으로써 너는 네 아들에게 사탄의 반복음을 퍼뜨리는 대리자가 되는거야.”
통제 대(對) 권위
정체성(identity)과 행위(behavior) 가 부모의 마음 안에서 결합될 때 부모는 생각하기를 아이가 그릇 행할 때 아이의 정체성을 축복하는 것이 그 아이의 행위를 용납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아들이나 딸의 행위를 훈련하기를 시도함에 있어서 부모는 그 아이의 정체성을 저주하는 것일 것이다. 반항적이고 그릇 행동하는 아이를 축복하는 것이 옳은가? 분명코 옳다. 축복하는 것은 그 아이의 인격에 (who the child is) 근거를 두고 하는 것이지 그가 행하는 것에 (what he does) 근거를 두는 것이 아니다.
누차 말하거니와 십대의 반란의 주요한 원인은 부모의 축복의 부족(결여)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 부모가 그 인격을 축복하고 그 행위를 훈련하게 의도하셨다. (God meant for us to bless the person and discipline the behavior.)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우리의 정체성과 구분하시고 그분의 우리에 대한 사랑이 우리가 하는 행위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는 너무 감사하다. 성경에 이르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여전히 죄인들일 때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점에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셨다.”고 했다.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toward us, in that while we were yet sinners, Christ died for us. Rom.5:8)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는 것보다 더 큰 복과 사랑의 확증을 생각할 수 없다. 예수께서 당신이 여전히 그분을 반역하고 있을 때 당신을 위하여 죽으시고 그분이 당신을 용납하셨음을 전달하신 사실은 그분이 당신의 죄악된 행위를 또한 인정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분은 당신의 인격과 당신의 행위를 구분하셨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인격에 복을 내리실 수 있으나 당신이 행한 것을 필연적으로 용납하지는 않으신다.
부모가 인격과 행위를 구별하지 못할 때 그들은 아이를 축복하기 위한 시도에서 그릇된 행위를 용인하거나 혹은 훈련을 행하려는 시도에서 아이의 인격(정체성)을 저주하든지 그런 덫에 빠진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부모는 그의 가족을 하나님의 통치 시스템보다는 마귀의 통치 시스템에 따라서 인도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사탄은 통제에 근거한 통치 시스템을 사용하나 반면 하나님은 권위의 발휘를 통해서 통치하신다.
1. 통제는 혼의 능숙한 힘을 사용하여 타인이 당신의 뜻을 행하게 강요한다 (위협하거나 겁을 주어서).
2. 권위의 발휘는 타인들에게 결과를 가져오는 선택들을 제공함으로써 타인들의 인격성과 의지를 존중함을 포함한다.
통제는 타인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지 않고 인정조차 않는 반면 권위의 발휘는 한결같게 사람들의 선택들을 존중하고 또한 한결같이 그릇된 선택들의 결과들을 적용한다. 하나님은 항상 사람들의 선택들을 존중하셨다. 하나님은 결과들이 따라오는 선택들을 제공하신다. (God offers choices with consequences.) 예를 들자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이런 선택을 제공하실 수 있다.
(a)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영원토록 그분의 임재 안에서 살거나
(b)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지옥에서 영원히 그분과 떨어져서 살거나 할 수 있다.
그분은 당신이 앞의 것을 선택하기를 애원하신다. 그것이 당신에게는 훨씬 더 좋으나 결정은 당신의 몫이다.
신 30:19 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 내가 하늘과 땅을 불러 오늘 너희를 대하여 증거케 한다. 내가 너희 앞에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놓았다는 것을. 그러므로 너희가,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또 다시 우리는 결과와 함께 선택들을 제공하시는 것을 본다. 내가 믿기로는 하나님의 의도는 그분이 우리를 통치하시는 방법과
똑같이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통치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성장하는 그들의 경험들 속에서 대부분 부모들은 오로지 통제의 시스템만을 알고 지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동일한 방법들을 사용한다. (번역자 첨부: 그 부모들이 그렇게 밖에는 다른 것을 배우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사탄의 통제 시스템이 저주의 환경을 키우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하나님의 권위의 시스템은 한편으로는 축복의 환경을 양육한다.
(번역자의 조언: 오늘의 글이 다소 어려운 듯 느껴지는 분은 Hill 목사가 겪은 경험담을 조금 후에 읽을 때 이해가 잘 될테니 번역자의 미숙함을 탓하지 마시고 조금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훈련의 세 가지 중요한 요소들
Three Critical Components of Discipline
여러 해 전 내가 축복의 문화를 만들고 또 내 자녀들을 다룸에 있어서 정체성을 행위와 분리하기 위하여서는 잠언 6:23에서 전달되는 가정 통치의 세 가지 요소들을 보충하기를 나는 배워야만 할 것을 알았다.
“그 계명은 등불이고 그 가르침은 빛이다. 그리고 훈련을 위한 꾸짖음은 생명의 길이다.” (For the commandment is a lamp and the teaching is light; and reproofs for discipline are the way of life. Prov.6:23) 여기서 훈련의 (징계의) 세 가지 요소들을 본다.
1. 계명 2. 가르침 3. 꾸짖음
첫째 요소, 계명은 내 아이에게 기대되는 바를 그에게 분명하게 전달했다고 보장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내 아이에게 그가 하도록 의무 지어진 것을 결코 그에게 말해주지 않은 어떤 것 때문에 징계를 한다면 그것은 그 아이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고 혼란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므로 첫 단계는 그 아이에게 요구되는 것을 분명하게 언급해 주는 것이다.
두 번째로 가르침이다. 그 나이에 맞는 언어로 이 규칙이 왜 중요한지를 아이에게 설명하는 것은 중요하다. 만일 당신이 아이에게 왜 그 계명이 존재하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명령을 한다면 그 아이는 당신이 결과를 적용하기 위하여 그 아이의 주변에 있을 때만 순종하기를 배울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아이가 그 계명의 뒤에 있는 지혜를 배운다면 그는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제한의 목적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 계명에 복종하기를 선택할 수 있다.
셋째 요소는 꾸짖음이다. 이는 한 계명이 범해졌을 때 결과의 적용에 관련된다. 기억하자. 하나님은 결과들이 따르는 선택들을 제공하심으로써 다스리신다. 그 꾸짖음은 그 결과인 것이다. 만일 부모가 계명을 범함 때문에 생긴 결과를 세워주지 않거나 적용하지 않는다면 부모는 자녀들의 삶에서 그 규칙을 무효하게 만들고 부모의 명령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셈이다.
많은 부모들이 정체성과 행위를 구별하는데 실패하고 그들이 세 가지 단순하고 실제적인 이유들 때문에 징계할 때 (사실은 화가 나서 자기 자녀들을 징계함) 축복을 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시스템을 배우지 못했다. 다른 이들은 그 시스템을 이해하지만 어떤 결정들을 아이의 분별에 남겨줄 것인지 미리 결정하는데 실패하고 어떤 결정들이 강제적인 결과들과 함께 경계선들을 요구하는지를 정하는데 실패한다. 여전히 다른 부모들은 경계선들을 정하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그 계명들을 위한 목적을 가르치지만 그들의 후손들이 자연적으로 순종할 것이라고 잘못 추정한다.
불행하게도 주어진 경계선들을 시험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므로 만일 부모들이 경계선들을 그을 장소와 만일 그들의 자녀들이 그 경계선들을 시험해보고 그 계명을 범할 때 (만일이 아니라) 어떤 결과들을 적용할 것인지를 미리 계획하지 않는다면 자녀들은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기를 애쓰면서 허둥지둥하게 된다.
부모들이 자녀가 경계선을 범할 때 무슨 결과를 적용할지 충분히 생각지 않았을 때 그들이 자녀의 행위를 통제하려는 시도 속에서 아이의 정체성을 저주함으로써 사탄의 통제 수단에 빠져드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때 이것은 과열된 정서적 교환을 초래하는데 (과격한 말이 오고 간다) 특히 십대들에 관해서 그러하다. 그리고 축복보다는 저주의 환경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한다. 이것은 많은 가정들에서 커다란 정서적 피해로 인도하는데 기본적으로 서로를 참으려는 시도를 하는 부모들과 자녀들 모두에게 그렇다. 더욱 심각한 상황들에서 이 상처는 깊은 비(非)호감과 증오로 가게 된다. 이제 한 예를 들어보겠다.
(번역자의 변: 이 부분의 문장들은 상당히 추상적이어서 실제적인 예를 제시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해하기가 난해하다. 그러나 조금 참고 다음 실례(實例)를 읽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쓰레기를 치워라
Take Out the Trash
에밀리는 불만이 많은 엄마이다. 그녀는 17살 먹은 딸이 그녀가 맡은 싫은 일을 시킬 수가 없을 듯한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딸 케이시는 화요일 밤에 쓰레기를 모아서 수요일 아침 일찍 거두어 가게 밖에 내어놓는 일을 책임 맡고 있었다. 그런데도 매주 화요일 밤이 돌아오곤 하는데 케이시는 잠옷을 입고 그녀의 방에서 있으면서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페이스북에서 친구들과 잡담을 하곤 했고 쓰레기는 쓰레기 버리는 곳에 놓여지지 않곤 했다.
에밀리는 딸에게 책임을 일깨워주곤 했고 케이시는 등교 전에 아침에 밖에 내어놓겠다고 약속하곤 했다. 그러나 에밀리는 바로 그 때가 되면 쓰레기를 내어놓겠다고 주장하곤 했다. 에밀리는 말하곤 했다. “아니야, 너는 아침에 내어놓겠다고 말했지만 네가 충분히 일찍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쓰레기 치우는 걸 놓쳤어. 그래서 우리는 다음 주간 동안 냄새나는 쓰레기 보따리에 시달리게 되. 제발 일어나서 지금 쓰레기를 내어놓아.”
케이시는 그 다음 날 등교 전에 그 싫은 일을 할 거라고 또 약속하곤 했다. “엄마,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서 아침에 내어놓을게요. 약속해요.”
에밀리는 안절부절하게 되는데 딸이 아침에 쓰레기를 내어놓는 것이 드물기 때문이다. 케이시는 잠옷 차림으로 있으면서 찡얼대곤 했다. “엄마한테 ‘그러나 엄마’라고 변명하지 말아!” 에밀리는 언성을 지르며 딸에게 말하곤 했다.
에밀리는 계속 말하곤 했고 케이시는 똥고집을 피우곤 했다 (to dig in her heels). “엄마는 쓰레기 나치당이야! 마치 수용소를 운영하는 히틀러처럼 모든 사람을 대한다고. 내가 이것을 아침에 할 수 없는 이유는 없어요. 왜 모든 것이 꼭 엄마의 방식으로 되어져야만 해요?”
이런 말들이 한 동안 계속되고 엄마는 점점 더 안절부절하게 되고 마침내는 비명을 지르고 딸에게서 작은 도구들을 (휴대폰이나 치장에 필요한 작은 기구들을) 빼앗아서 딸이 일어나 쓰레기를 내어놓게 했다. 케이시는 울면서 달려나가고 엄마를 미워한다고 소리지르곤 했다. 그래서 에밀리는 포기하곤 했고 케이시에게 쓰레기는 아침에 수거하게 준비하는게 더 좋다고 말하곤 했다. 물론 케이시는 늦잠을 자곤 했고 쓰레기는 모아지지 않은 채 남겨지곤 했다.
그 시점에 에밀리는 완전히 성질이 나서 케이시에게 고함을 지르고 그 딸이 무가치하고 게으르고 엉덩이에 있는 무책임한 골칫거리라고 부르곤 했다. (completely lose her temper and . . . calling her a worthless, lazy, irresponsible pain in the rear) 케이시는 그 말을 듣고 문밖으로 뛰어나가면서 엄마에게 모욕을 퍼붓곤 했다. 이런 일이 매주 반복되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에밀리는 그 딸의 생애에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기보다는 사탄의 대리자가 되어버렸다. 엄마는 그 가정에서 축복보다는 오히려 저주의 문화를 만들어버렸다. 에밀리는 다른 무엇을 할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녀에게 하나님의 권위의 시스템을 가르쳐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에밀리는 그녀의 교회에서 개최된 우리의 “세대 축복 경험들” (Blessing Generations Experiences)이란 명칭의 모임 중 하나에 참석했다. 에밀리는 자기 딸을 축복하기 보다는 저주하는데 사탄의 대리자로서 사용되었음을 깊이 확신하게 되었다. 에밀리는 자기가 항상 케이시의 정체성을 공격했고 딸에게 사탄의 무가치 메시지를 전달했음을 기억할 때 주님 앞에서 비통하게 울었다. 그녀는 케이시의 강한 의지를 다루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었다.
에밀리가 토요일 저녁 귀가했을 때 그녀는 케이시에게 자기와 이야기할 수 있을지 물었다. 케이시는 공부할 교재를 마친 후 식탁에서 엄마와 함께 앉았다.
“케이시, 나는 방금 이 주말에 내가 마치 나치 수용소 지휘관처럼 너를 다루어왔음을 깨달았단다. 내가 원하는 바를 너에게 시키려고 나는 너를 위협하고 강제하고 강압하고 (coerce) 너에게 소리를 질렀고 너를 큰 무시와 불명예로 (with great disrespect and dishonor) 대해왔구나. 나는 이번 주말까지 이것이 잘못되거나 너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단다. 나는 너를 바로 잡아주기 위하여 어떤 다른 방법을 몰랐단다. 네 마음 속에서 나를 용서할 수 있겠니? 나는 변화되고 하나님이 나에게 바라시는 엄마가 되기를 참으로 원한단다.”
케이시는 자기 엄마가 이런 말들을 하는 것을 들으리라고 기대하지 못했으므로 눈물이 터지기 시작했다. 충격을 극복한 후에 케이시가 대답했다. “네, 엄마. 정말 용서해요. 엄마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줄 생각도 못했어요. 내 평생 엄마는 내가 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 그 어떤 것도 엄마가 보기에 옳다고 보지 않는 듯이 저를 대했어요. 엄마가 자신이 한 일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는 것을 들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예요.”
세대축복 경험들 기간 동안 에밀리는 그녀는 깨달았다. 자기 엄마로부터 어떤 과오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것, 어떤 비행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배웠다는 것을. 에밀리는 말했다. “케이시, 나는 이제 네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안단다. 내 엄마는 나에게 정확히 그같이 하셨거든. 나는 생각했지. 내가 너의 엄마이기 때문에 내가 나에게 복종하게 강제하는 것이 내 할 일이라고 말이야. 나는 어제까지도 이런 것이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들을 대하시는 방법이 아니라, 사탄이 사람을 다루는 방법이라는 것을 결코 깨닫지 못했어. 내가 너를 어떻게 대했어야 하는지에 있어서 나는 그렇게 잘못 해온거야.”
케이시가 말했다. “엄마, 난 정말 엄마를 용서해요. 그리고 나 또한 상처주고 공경치 않는 말들을 엄마에게 되돌려 주었다는 것을 알아요. 엄마 또한 저를 용서해주실 거죠?”
에밀리는 이제 펑펑 울면서 의자에서 일어나 그 딸을 얼싸안았다. “물론 용서하지. 내가 너를 대해온 방식 때문에 너무 미안해. 너를 사랑한다. 너는 가히 믿기지 않는 가능성을 가진 하나님의 훌륭한 청년이지. 너는 멋있고 아름답고 하나님은 너에게 지도자가 될 은사를 주셨다. 나는 네가 내 딸로서 아주 자랑스럽고 나는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
쓰레기를 치워라
엄마와 딸은 한참 포옹을 하고 제 자리에 앉았다. 엄마가 딸에게 말했다. “난 내일 너와 좀 시간을 갖고 싶어. 네 아빠와 내가 미래에 너희 행동을 고치기 위한 방법에 대하여 너와 얘기하고 싶거든.” “좋아요, 엄마.” 케이시가 대답했다.
그 다음 날 에밀리와 그 남편 커트는 사탄의 통제 시스템 대신에 하나님의 시스템, 즉 권위의 사용을 가지고 통치하는 것에 대해 주말에 그들이 배운 바를 딸에게 설명했다. “나는 너의 의지를 인정하거나 존중하지 않았단다. 나는 너를 오직 한 가지 의지만이 여기에 있는 것처럼 너를 대해왔어. 지금부터 우리는 계속 너를 강압하거나 강제로 해서 우리의
뜻을 네가 행하게 하려고 하기보다는 결과를 가진 선택들을 너에게 제시하겠어.”
“예를 들면, 화요일 저녁에 쓰레기를 내어놓는 그 귀챦은 일에 관하여 우리 모두 과거에 너를 대해온 방식에 대하여 아주 미안하다. 우리를 용서해주겠니?” 아빠 커트가 말했다. 케이시가 대답했다. “예.”
“지금부터는 우리가 결과 따르는 선택을 너에게 제시할거야. 그래서 너는 쓰레기를 모아서 수요일 등교 때까지 내어놓는 것이 네 책임이라는 것을 동의해야 한다.” “예, 아빠. 그리고 저는 제 시간에 참으로 그것이 되게 더 잘할게요.”
쓰레기를 치워라
“좋아, 어떤 경우든, 너의 엄마나 내가 그것에 관해 너를 성가시게 하지 않을거야. 어떻게, 언제 그걸 할 건지는 네 선택이야. 아무튼, 너의 선택들에는 결과가 있을 것이다. 너는 수요일 등교 때까지 쓰레기를 확실히 내어놓기를 선택할 수도 있어. 그 선택의 결과는 우리가 모두 다음 주간을 쓰레기에서 해방되어 살 것이라는 것이지. 혹은 그 시간까지 내어놓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어. 그 선택의 결과는 내어놓지 않은 쓰레기 때문에 개인적인 책임을 져야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해하겠니?”
케이시는 아빠가 하고 있는 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부모의 새로운 태도를 좋아했고 엄마가 더 이상 쓰레기 때문에 자기에게 소리지르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 기뻤다. “알았어요. 아빠, 좋아요.”
에밀리가 덧붙였다. “마지막 한 가지가 있어. 우리는 네가 정시에 쓰레기를 내어놓기를 높이 권한다. 나는 너에게 그게 훨씬 더 기쁠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케이시가 대답했다. “좋아요. 엄마.”
그 다음 화요일 저녁 케이시는 쓰레기를 모아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쓰레기를 밖에 내어놓기를 선택했다. 에밀리는 기뻤고 그들의 대화가 제법 잘 됐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 다음 주간 에밀리는 케이시가 잠옷 차림으로 화요일 저녁 아이패드에 매달려 있는 것과 쓰레기는 모아지지 않고 밖에 내어놓지도 않은 것을 알았다. 이번에 에밀리는 평온했다. 케이시를 통제하는 것이 자기의 책임이 아니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딸에게 분명한 선택을 주었다. 그녀는 딸에게 소리지르는 것 대신 케이시의 방에 들어가서 굿나잇 키스를 했다. 그녀가 말한 것은 이게 다였다. “기억해라, 내 사랑스런 딸, 내일은 쓰레기 버리는 날이라는 걸.”
케이시의 대답은 “알아요. 엄마. 아침에 할 거예요.” 에밀리는 굿나잇하고 그녀의 저녁에 대해 얘기를 계속 했다. 물론 그 다음 날 아침 케이시는 늦게 일어났다. 쓰레기를 처리할 시간이 없었다. 그 애는 토스트 한 조각을 움켜쥐고 학교에 도착할 마지막 순간에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에밀리는 아주 평온했다. 케이시를 통제하는 것이 자기 할 일이 아니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명령을 (교훈을) 하고 결과를 적용하는 것은 그녀의 일이었다. 하나님은 케이시를 변화시키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다.
케이시가 그 날 오후 학교에서 귀가했을 때 자기 방으로 가면서 엄마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아침에 쓰레기를 내어놓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케이시는 엄마가 그것 때문에 자기에게 소리를 지를 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즐거운 기분이다. 엄마는 일체 쓰레기에 대해 언급이 없었다. 단지 학교에서 어땠는지만 물어보았다. 케이시는 다소 엄마의 평온한 처신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엄마는 정말로 변했는가 봐.”
엄마와 간단한 대화를 교환하고서 케이시는 이층 자기 방으로 갔다. 약 20초 후에 케이시는 얼굴에 겁난 표정을 하고 뛰어 내려왔다. “엄마, 내 방 마루 위에 다섯 개의 쓰레기 가방들이 있어요!” 비명을 질러댔다.
에밀리가 조용히 말했다. “알아. 우리가 선택들과 결과들에 대해 대화를 했던 것을 기억해.” 케이시가 말했다. “예, 그러나 내 방 마루 가운데 쓰레기 가방 다섯 개는 왜 있어요?” “음, 네가 기억하듯이 우리는 각 선택에는 결과가 있을 거라고 설명했지. 너는 정시에 그것을 내어놓지 않기를 선택했어. 우리는 네게 설명했다. 만일 네가 그 선택을 하면 너는 쓰레기에 대해 개인적 책임을 져야만 할거라고. 너는 그것이 내어놓아져야 하는 정시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주간까지 네 방에 두는 것이 공평할 뿐이야. 우리 나머지 사람들 중에 아무도 그 쓰레기에 대해 책임이 없고 그것을 우리의 공간에 두기를 원하지 않아.” “그러나 엄마, 냄새가 나쟎아! 또 내 방의 절반을 차지한다구요.” “내 딸아, 미안하구나. 나는 그게 기쁘지 않다는 걸 알지. 우리는 네가 그 결과를 더 즐길거라고 생각했단다. 그러나 너는 다른 선택을 했지. 그 말의 뜻은 다음 주 화요일 저녁까지 너는 네 방에서 그 쓰레기를 보관해야만 할 거라는 것이다. 내 사랑스런 딸, 나는 네가 알기를 원해. 우리가 화가 나서 그러고 있는 것이 아니란다. 우리는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해. 너는 우리 딸이야. 너는 아름답고, 멋있고 하나님은 네 생애를 위해 믿겨지지 않는 계획을 (destiny) 갖고 계셔. 그러나 너는 그 선택을 했고 이것은 그 결과야. 내 사랑하는 딸, 하나님이 너에게 복 주시기를 빈다. 잘 자거라.”
그 시간으로 케이시가 수요일 아침 등교 전에 쓰레기를 내어놓지 않는 것은 끝이 났다. 커트와 에밀리는 분명한 결과들이 있는 선택들을 제시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러나 딸에게 소리지르고 위협함으로써 딸을 통제하고 조종하려고 하기보다는 케이시가 선택하게 시켰다.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 시스템을 사용했을 때 그들은 딱 한 번 잘못된 선택에 대한 결과를 적용해야만 했다. 그들이 만일 사탄의 시스템을 계속 사용했다면 그들은 그 딸이 쓰레기를 내어놓도록 거의 매주 잔소리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것은 딸과 그 부모 사이에 건강한 인간관계를 재건하는데 도움이 된 많은 경험들 중에 첫 번째 것이다. 한편으로 잘못된 선택들에 대한 결과들을 적용하면서 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권위를 연습하는 것은 당신이 이전에 당신 스스로 이런 종류의 부모 노릇을 경험한 적이 없다하더라도 당신 가정의 분위기를 전적으로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 시스템이 작용하는 것이다.
가정의 축복의 시간을 세우는 방법
How to Establish a Time of Family Blessing
짜여지고 규칙적인 축복의 시간이 없이는 자녀들이 그들의 부모로부터 단지 교정의 말들과 훈련의 말들 만을 듣기 쉽다. 당신의 가정을 위하여 주마다의 축복의 전통을 왜 만들어내지 않는가? 이 작업을 실제적으로 만드는 열쇠는 세워진 유대인 가정들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고 당신이나 당신의 자녀들이 포함될 수도 있는 다른 모든 활동들 위에 이 축복의 시간을 우선적으로 두는 것이다. 당신은 이런 세 가지 단계들을 따름으로써 당신 가정 안에 당신 자신의 전통을 출발할 수 있다.
1. 함께 하는 식사 시간을 가지라.
2. 식사 후에는 회개의 시간과 축복의 시간을 개시하라. 축복을 추구하는 사람으로부터 정신적인 상처를 그가 전달하고 있
을 때 아무도 축복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감지된 잘못이나 실제적인 잘못들을 언급함으로써 당신의 축
복의 시간을 시작하라고 제안한다. 나는 알았는데 만일 당신이 당신 자녀의 눈을 직시한다면 당신은 즉각 공격이나 치료
되지 않은 정서적 상처가 있는지 여부를 분별할 수 있다. 공격을 받은 사람은 그를 공격한 사람과 눈맞춤을 유지하기에
힘든 시간을 갖는 법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과 자녀 사이에 공격이나 정서적 거리를 분간한다면 나는 회개와 더불어 축복의 시간을 시작하라고 제안한다. 만일 당신이 그 주간 동안에 정서적인 상처를 주었거나 당신 자녀들 중 하나의 정체성을 저주한 것을 안다면 그 공격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라. 당신이 온전히 잘못하지 않았더라도, 만일 당신 자녀의 마음에 공격이나 상처가 있다면, 또 당신이 당신과의 사이에 정서적인 거리를 감지한다면 그 공격을 인정하고 상처를 일으킨 것 때문에 회개함으로써 이것을 수리하기를 추구하라.
3. 각각의 가족을 축복하라. 모든 상처들과 공격들이 취급될 때 당신은 개인적으로 각각의 자녀를 축복할 수 있다. 나는 당
신이 죤 트렌트 (John Trent)와 개리 스멀리 (Gary Smalley) 에 의해서 축복이란 주제에 관한 그들의 이정표적인 책에서 개요가 적힌 축복의 다섯가지 핵심적인 요소들을 사용하기를 제안한다. 그 다섯가지란,
(1) 적절한 의미가 있는 접촉 (touch)
(2) 입에서 나온 말
(3) 축복을 받는 사람에게 높은 가치를 붙여주는 것
(4) 축복을 받는 사람을 위한 특별한 미래상을 그려주기
(5) 축복의 말이 성취되도록 돕는 적극적인 위임
가정 축복의 시간을 정하는 방법
How to Establish a Time of Family Blessing
당신은 “지붕 위의 바리올리스트”라는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테비와 골다가 그들의 딸들에게 말해주는 안식일 기도는 당신이 자녀들 위에 선언하기를 고려할 수 있는 축복의 형태의 한 가지 훌륭한 모범이 된다.
주께서 너희를 지키시고 방어하시기를 기원하노라.
그분이 너희를 항상 수치로부터 방어하시기를 기원하노라.
너희가 이스라엘에서 빛나는 이름이 되기를 기원하노라.
너희가 룻과 에스더와 같기를 기원하노라.
너희가 칭송받을 만한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노라.
오, 주님, 그들을 강하게 해주소서.
그리고 저들을 낯선 자들의 길들로부터 지켜주소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복을 주시고 장수를 허락하시기를 기원하노라
주님께서 너희를 위한 우리의 안식일 기도를 성취하시기를 기원하 노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좋은 엄마와 아내로 만드시기를 기원하노라.
그분이 너희에게 너희를 돌볼 남편을 보내시기를 기원하노라.
주님이 너희를 지키시고 변호하시기를 기원하노라.
주님이 너희를 고통으로부터 보존하시기를 기원하노라.
오, 주님, 저들에게 행복과 평강으로 은총을 내리소서.
오, 우리의 안식일 기도를 들으소서. 아멘. 2
2. Fiddler on the Roof, directed by Norman Jewison (1971; Hollywood, CA: MGM).
가정 축복의 시간을 정하기
How to Establish a Time of Family Blessing
가정 축복은 당신의 자녀들을 너머 뻗어나간다. 만일 당신 기혼자이면 당신 배우자에게 복을 기도하는 것을 매일의 실행으로 삼으라. 당신은 이것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소비할 필요가 없다. 하루에 2-3분이면 할 것이다. 부부 중 한쪽인 당신을 위해 일하는 지속적인 시간을 찾으라. 당신이 서로 축복할 때 꼭 당신의 배우자의 눈을 들여다보라. 그래서 당신이 말로만 아니라 또한 당신의 눈과 얼굴 표정으로 복을 전달할 수 있다. 당신의 아래의 것 하나하나를 하면서 1~2분 보낼 수 있다.
1. 만일 하나님이 당신이 앞선 24시간 안에 당신 배우자를 대하여 상 처를 주었거나 범죄했다고 보여주신다면 회개하기.
2. 당신 배우자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기. (배우자에 대하여 당신 이 인식하는 우수한 특징들을 인정하기).
3. 당신의 배우자와 그의 날 위에 복을 선언하기.
축복의 전통을 세우는 것은 당신의 배우자와 자녀들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것이다. 당신은 그들의 현재와 미래 속으로 생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당신이 그들을 위해 가지는 깊은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매주 가족 축복의 시간을 제쳐둠으로써 당신은 또한 당신의 가정이 다른 모든 의무들보다 우선이라는 본보기로써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 가정 안으로 이런 종류의 투자를 한다면 미래의 세대들을 위해서 열매를 맺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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