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은 스페인, 미국, 일본 등의 식민통치 영향으로 동서양이 교체되는 복합문화형태를 띠고 있으며 천주교가 국교로 되어 있으나,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천주교 신자가 83.6%이나 다수가 전통무속종교 와 혼합되어 있으며 미신적인 신자들이다. 개신교는 전체 인구의 10%정도이며 그중 5.2%가 열심히 있는 신자이다.
"카톨릭과 타종교와의 만남
가톨릭 교회는 제 2 차 바티칸공의회((Concilium Vaticanum Secundum)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로마 가콜락교회의 공의회이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장차 앞으로 나아갈 길을 타진한 교회의 현대적 개혁이 이 공의회의 목적이었다. 현재 기독교 역사상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공의회이다.)를 기점으로 타종교와의 만남과 대화에 대한 과거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획기적으로 전환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편협하고 배타주의적인 세계관을 제시하지 않았다. 예수는 사마리아와 로마의 관리들에게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한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은 타종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개방적 태도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는 오랫 동안 타종교 전통에 대해 편협하고 배타적인 자세를 견지했고 타종교인들을 회개와 개종의 대상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제 2 차 바티칸공의회는 역사상 처음으로 타종교 전통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깊게 성찰,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은 『가톨릭 교회는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며 『그들 안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혹은 윤리적 선과 사회적 내지 문화적 가치를 긍정하고 지키며 발전시키기를』 권고했다. 이후 가톨릭 교회는 타종교와의 대화를 위한 기구들을 설립해 종교간 대화를 실천하고 각종 관련 문헌들을 통해 교회의 입장을 표명해왔다. 특별히 위대한 종교 전통을 보유한 아시아 대륙에서는 타종교들과의 만남과 대화의 중요성이 각별히 강조됐다. 교황 요한 바오로 2 세는 2000 년 대희년을 준비하면서 개최된 주교대의원회의 아시아 특별총회 폐막 후 발표한 권고 「아시아 교회」에서 아시아 대륙에서 종교간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설명에서 보듯이 카톨릭은 토착화의 한 방편으로 많은 오력을 했다."
1) 필리핀 교회현황
Philippine Crusade Inc. 에 의하면 1999년 8월 현재 전국에 32,989개의 교회가 있으며 전체 인구에 비하면 한 교회가 2,815명을 감당해야 하는데 실제 교회참석 인원은 평균 58명으로 나타났다. 이 들은 개신교인의 비율을 5.2%로 집계하여 선교의 가능성을 증명해 주었다. 또 한 이들이 벌리고 있는 K.A.W.N. 2000 운동은 2000년까지 전국 5만개의 동네에 적어도 한 교회를 세우자는 것인데 앞으로 도 23,752개의 교회가 더 필요한 상태이다.
1899년 최초의 개신교 미국 선교사가 들어온 후 지금까지 필리핀은 어느 나라보다 예배하며 활동하기에 자유롭다. 2,000여명의 선교사들이 방방곡곡에서 일하고 있으며 300여 개의 교단 이 등록되어 있고 그 결과 이미 굵직한 교회들이 여럿 생겨났다. 70년까지만 해도 4,300여 교회이던 것이 80년에 13,600 교회로 90년에 27,000교회로 성장하고 있다. 또한 성장한 교회 들도 주로 성령운동을 하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이 많은 편이다.
필리핀은 아시아 지역에서는 드물게 볼 수 있는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이다. 자국 내로 혹은 외국으로 선교사로 이미 선교사를 내보내고 있다. D.A.W.N. 2000의 통계로는 Africa 3, Austria, 1, Bolivia 1, Canada 2, Kenmark, England 1, Hongkong 6, Indonesia 7, Ireland 1, Japan 5, Korea 1, Malysia 4, Micronesia 2, Newguinea 5, New Zealand 2, Pakistan 1, Palau 1, Parayguay 2, Philippines 500, Saipan 3, Saudi Arabia 1, Singapor4 2, Swaziland 4, Taiwan 4, Thailand 5, UA Emirates 3, USA10, Zambia 2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1988-1990 Filipino Missionary Directory).
164개의 언어족 중에 134가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었고, 31개는 신약만 50개가 쪽복음만 번역된 상태이다. 교육에도 열심이어서 1974년 통계로 신학교 74개이던 것이 91년통계로 210개의 교회 혹은 기관이 신학교 혹은 교육기관으로 등록되었다. 신학교육도 주로 서양의 시상을 번역하여 가르치는 단계에 있으며 많은 학교들이 지역여건을 고려하여 신학연장교육(TEE)을 많이 실시하고 있다. 문서전도기관도 63군데나 등록되어 있고 이들이 도서를 펴내고 전도지를 개발하며 교육자료, 성경공부안, 기타 신앙지를 만들고 있다. 기독교방송과 텔레비젼 방송국이 있어 방송을 통한 전도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2) 카톨릭 선교
동남 아시아 지역에서 주후 1500년에서 1700년 사이에 원주민들 가운데 대다수가 신앙을 고백하는 기독교인이 된 섬은 필리핀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원시상태에 있었으며 종교적으로 고등 신앙(higher faiths)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단지 이슬람교만이 아시아 대륙에서 종교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슬람이 세워진 곳에서 기독교는 많은 진척을 보이지 않았다. 필리핀에서 회교가 기독교보다 앞섰다. 스페인 사람들이 오기 전에 보르네오로부터 모슬렘 상인들이 먼저 와서 그들의 신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슬람이 1세기 또는 2세기를 앞질렀기 때문에 필리핀 섬들이 기독교화 되기보다 이슬람화 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스페인 선교사들이 때에 맞게 도착했다. 물론 남쪽에 많은 모슬렘 교도들이 있었다. 스페인 정복이 시작된 몇 년 후인 1573년에 큰 북쪽 섬인 루손 섬의 원주민들 중 얼마는 (특히 해안쪽) 모슬렘교도였다. 남쪽에 흩어진 모슬렘교도들이 부분적으로 민다나오의 통치자와 교전이 있은 후 부분적으로 이슬람의 전도가 금지되었고, 이슬람교도들의 집이 파괴되었으며 기독교의 가르침만이 허락되었다. 북쪽에서 는 기독교가 이슬람이 발판을 만드는데 방해가 되었다.
필리핀이 기독교화 되었던 요인은 구미와의 접촉 때문이었다. 뚜렷하게 영향을 준 나라는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18세 기까지 유럽국가들 가운데에서 가장 공격적이며 포르투칼과 네덜란드보다 힘이 강한 나라였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 필리핀은 거의가 스페인의 소유가 되었다. 스페인의 선교사가 동남아시아에서 다른 지역보다 필리핀에서 더 큰 부분을 차지했다. 서구인들의 주요 목적은 상업이었고 기독교 신앙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필리핀에서 상업보다 선교가 더 뚜렷했고 정치적 정복보다 기독교 전파가 앞섰다. 필리핀은 아시아 선교를 위한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선교사들 은 더 많은 기독교인들을 얻었으며 선교사들이 동인도와 인도차이나, 중국, 대만, 일본 등으로 갔다. 실제로 필리핀은 스페인의 정치적 종교적 정복을 위한 전략지로 생각되었다.
마젤란(Ferdinand Magellan, 포루투칼 탐험가)은 챨스 5세 황제의 명령으로 지구의 정반대로 항해하여 유럽인들 일행과 함께 1521년 필리핀 막탄선(Mactan)에 도착하였으며 약 한달후인 5월에 라푸라 루라는 추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529년에 포르투칼인의 경계선 확장을 필리핀에 두었으나 스페인 사람들이 섬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1542년에 빌라로보스(Villalo-bos)의 원정이 실패했으나 1565년에 레가스피(Lopez de Legaspi)의 영도 아래 섬들의 정복이 시작되었다. 필리핀을 정복한 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스페인의 정복의 확장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필리핀 회심 자들을 얻은 것은 놀라울 만한 것이었다. 마젤란과 빌라로보스에 의한 필리핀 회심자들이 생겨나긴 했으나 정치적 정복처럼 영구적인 기독교를 심은 것은 레가스피에 의해서였다. 레가스피의 지시에 의하면, 모든 탐험가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행동해야 하며, 주님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을 공경해야 하며, 원주민들을 잘 대우해야하며, 종을 사고 파는 일에 종사하지 말아야 했다.
레가스피와 함께 5명의 어거스틴 수도승들이 왔으나 그 중에 3명만이 필리핀 섬에 남았다.
어거스틴 교단에 이어서 1577년에 프란시스 교단이 도착했으며, 1578년에 도미니크 교단이
교황의 명령으로 마닐라에 주교구 성당을 세우기 위해 들어왔으며, 이어서 제수잇 교단 이 들어왔다. 이들은 점유한 후 1세기 동안 종교적 열정과 군사적 정복의 결합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가 필리핀 회심 자들을 얻는 데 성공케 했다. 기독교는 필리핀 사회에 많은 일을 했으며 오늘날 필리핀 사람들의 72%가 아시아에서 단지 명목상 그리스도인 국가로 만든 카톨릭 교회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스페인의 필립 2세에 의해 식민정책의 주요목적으로 신앙을 전파하게 하여 교회, 병원, 학교들을 세웠으며 원주민 성직자들을 훈련시켰다. 처음 필리핀 감독 조르게 바르린(Jorge Barlin)이 생겨난 후로 1905년까지 주교감독이 생기지 않았다.
이슬람이 인도네시아로부터 북쪽으로 퍼질 때 카톨릭이 이슬람의 전진을 막는 역할을 했다.
비기독교인들 가운데에는 수년 동안 산 속으로 쫓겨난 일백만 정도 의 부족들과 이방인들이있다. 또한 민다나오(Mindanao) 남쪽 섬에 주로 모여 사는 모로스(Moros)라 불리는 2백만의 모슬렘교도들이 있다. 마닐라에 30만의 중국인들이 있으며 주요 도시들 가운데 주로 종교적으로 불교인, 문화적으로 유교인 들이 있다. 필리핀 독립교회(Philippine Independent Church)가 아글리파안 교회(Aglipayan Church)교회로 언급되기도 하는데 그 지도자 그레고리 오 아글리피아(Gregorio Aglipay)가 로마에 반대하여 독립 국가적인 카톨릭 교회를 설립했는데 1902년에 형성되었다. 수년간 필리핀 독립 교회는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자유진영과보수진영 사이의 불화로 인해 교회에서의 분열을 가져왔다. 1948년 이래로 필리핀 독립 교회 의 세 감독들이 미국인 대주교의 손에 성별 식을 받았을 때 두 교파 가 협력하여 일했다. 케손시에 있는 성 안드루 신학교(St.Andrew's Theological Seminary)가 지금 연합기구이며 두 교파 간치 성직자들 을 훈련시키고 있다. 1961년 이후로 그들 사이에 친밀한 교섭이 있었다. 필리핀 독립 교회는 150만 이상의 회원들을 가지고 있으며, 수십 개의 교구 안에약 40명의 감독들을 가지고 있다.
3) 개신교 선교
미국으로부터 개신교 선교협회들이 쇄도하여 들어왔다. 그 첫 번째가 미국 장로교회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였다. 장로교 개척선교사는 1899년 4월에 도착한 제임스 로저스 박사(Dr. James B.Rodgers)였다. 두마케티시에 있는 유명한 실리만 대학교(Silliman University in Cumaguete city)는 1901년에 장로교인에 의해 창설되었다. 처음부터 장로교회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주장했다. 1907년에 그들은 마닐라에 연합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를 세우기 위해 감리교인 들과 손을 잡았다. 1992년에 그들은 연합복음주의교 회(United Evangelical Church)를 형성하기 위해 회중교인들과 연합형제회들과 통합했다.
1947년에 교회와 선교가 통합했으며 그 후 선교사들은 형제의 일꾼들로서 교회에서 봉사했다. 1948년 이후는 장로 교인들의 일이 필리핀 연합교회를(United Church of Christ in the Philippines) 구성하는 부분이 되어왔다. 지난 10년 동안 우호적인 일꾼들의 수가 감소했다.
대략 1/3이 교회 일에 머물렀고 나머지는 의료와 교육과 행정 일에 머물렀다.
필리핀에 들어간 두 번째 선교회는 감리교 성공회(Methodist Episcopal Church)였다. 감독 제임스 써번(Bishop James M. Thoburn)은 1899년에 마닐라를 방문하여 필리핀 섬들에서 사역을 의논했다. 처음 선교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초기의 회심자인 니콜라스 자모라 목사가 일을 수행한다. 처음 선교사들은 1900년 2월에 마닐라에 도착 한 WFMS에 소속한 5명의 여자들이었다. 한 달 후 토마스 마틴 목사가 도착했고 이어서 후에 감독이 된 호머 스텐츠(Dr.Homer C.Stuntz)박사가 일을 수행했다. 여성들을 위한 첫 성경학교가 위니 프레드스폴
딩 양(Miss Winifred Spaulding)에 의해 열렸다. 첫 선교 회의는 1905년에 조직되었고 1908년에 정기회의를 가졌다. 감리교 성공회는 세 번(1905, 1909, 1933년)이나 갈라졌다. 첫 필리핀 감독이 1944년에 임명되었다. 오늘날 감리교회는 5개 연회로 조직되었고 모 든 주요직위들은 필리핀인 들이 차지하고 있다. 미국 선교사들은 협력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1952년까지 필리핀 연합교회의 문제로 감리교회의 사역이 북 루손섬에 한정되었으나 그 이후로는 교회와 선교 일이 민다나오까지 확대되었다.
미국 침례교(American Baptists)는 1900년에 현지에 도착하여 파나니(Panay)와 네그로스 (Negros)섬들에 노력을 집중했다. 에릭 룬트박사(Dr.Eric Lund), 스위스 침례교 선교사는 미국 침례교 외국인선교사협회의 처음 대표자였다. 그와 그의 동료 브라우리오 마니칸(Braulio Manican)은 1912년 파나이어와 비사얀어 성경번역을 마쳤다. 첫 선교 병원이 안드루홀 박사(Dr. Andrew Hall)에 의해 일루일루(Iloilo)에서 열렸다. 1905년 미스 안나 쟌슨(Miss Anna Johnson)은 침례교 선교사 훈련학교를 세웠다. 필리핀 침례교회 협의회는 1935년 에 형성되었는데 세례 교인 3만을 가진 교회로 300여 교회가 있다.
다음은 1901년에 생긴 그리스도의 제자교회(The Disciples of Christ)가 있다. 그들은 마닐라를 피하여 북 루손으로 갔으며 라오악 (Laoag)에 본부를 세웠다. 1901년과 1954년 사이에 이 선교회의 70명의 선교사들이 이 섬에서 사역했다. 1943년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복음주의교회를 형성하기 위해 연합형제회(United Brethren)와 통합했다. 이들은 후에 필리핀 연합교회가 1948년에 조직될 때 가장 큰 연합회원이 된 교회이기도 하다.
1902년에 외국선교를 위한 미국인 이사회는 일치에 의해 민다나오 남쪽 섬으로 할당되었다.
그 당시 50%가 명목상 카톨릭 교도였고 30% 가 모슬렘교도였으며 나머지는 이방인이었다.
개척 선교사인 블랙 목사 부부(Rev.and Mrs.R.F.Black)는 다바오 (Davao)에 위치했다. 회중교회는 연합복음주의교회를 형성하기 위해 1929년에 장로교회와 연합형제교회와 통합했다.
1948년에 새로 형성된 필리핀 연합교회의 일부가 되었다.
미국성공회(Protestant Episcopal Mission)는 1902년에 일을 시작했다. 이들은 항상 마닐라에 있는 영미 사회에 중요한 사역을 계속해 왔다. 또한 루손 산간지역의 이고롯쪽(Igorots)과 남쪽 민다나오의 원주민들을 중심으로 선교를 펼쳤다. 성 안드루 신학교와 트리니티 대학이 필리핀 독립교회와 지금 손을 잡고 일하고 있다. 필리핀 성공회는 거의 6만 명에 이르는 세례교인들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선교연맹(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은 1902년에 민다나오 남부 섬에서 일했으며 여러 달 후에 선교사가 콜레라로 죽자 일을 보류하기도 했다. 수년 후인 1908년에 일을 시작하여 2커플을 얻었고 1941년에는 30명의 사역자를 얻었고 1947년에는 필리핀 기독
교선교연맹이 독립하게 되었다. 1969년에는 558명의 회원들을 얻었다. 세례교인은 2만을 확보했다. 여러 수준에서 기독교인 훈련을 하 는 4개의 성경학교를 운영했으며 평신도 지도자들을 훈련시켰다.
2백만장 이상의 복음문서를 정기적으로 찍어내는 연합출판사를 만들었다. 또한 라디오 방송도 민다나오에서 활발히 추진되고 있는 사역중 하나이다.
1958년에 시작된 좋은 소식시간(Good News Time)은 22주간 방송으로 확대되었고 그 중에 4개의 상업방송과 하나의 교회와 관계 된 방송을 가지고 있다.
제칠일 재림교(Seventh Day Adventists)는 1910년에 필리핀에서 선교를 시작하였고 여러곳에 강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 174개의 초등 학교, 20개의 고등학교, 2개 대학과 6개의 병원을 가지고 있다.
교회 개척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125,000명의 회원을 모았고 1,165개 정도의 교회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성회(The Assemblies of God)는 미국에서 회심하여 미국 성경학교에서 훈련받았던 필리핀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다. 자기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강한 열정을 가지고 1930년에 필리핀에 돌아와 하나님의 성회 교회를 세웠다. 오늘날 이들 중 몇몇은 훌륭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에서처럼 하나님의 성회는 복음 전도와 교회개척에 열심이다. 오늘까지 각 지역에 6개의 성경학교를 세웠고 1964년에 극동신학교(Far East School of Theology)를 마닐라에 세웠다. 성경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연장교육을 시키려는 목적이었다.
현재 425교회에 5만의 세례교인을 확보했으며 700명의 자 국인 사역자들과 45명의 선교사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연합그리스도 교회(United Church of Christ in the Philippines : UCCP)는 1948년에 연합교회를 형성하기 위해 세 개의 교파가 통합 을 했다. 이 교파들은 연합복음주의교회(장로교회와 회중교회 : United Evangelical Church)복음주의교회(연합형제교회와 그리스도의 제자교회 : Evangelical Church), 필리핀 감리교회(독립교회 : Philippine Methodist Church)였다.
다섯 개의 미국인 교파들이 연합 교회와 협력했다(그리스도의 제자교회, 연합장로교회, 연합감리교회, 개혁교회, 연합그리스도교회).
이들 교회에서 연합교회에 70여명의 선교 사역자들을 할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선교부는 교육, 의료, 행정사역에도 해마다 협력을 해왔다.
해마다 4-5%의 성장률을 가지고 도 엽합교회는 1,400명의 모든 전도자들에게 신학교 훈련사역을 후원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400명만이 목사로 임명되었다.
연합그리스도 교회는 160.000명의 세례교인을 가진 분명히 필리핀에서 가장 큰 개신교회가 되었다. 연합교회는 성경학교, 학원, 중소 대학, 간호학교, 두 신학교와 실리만 대학 등 20개 이상의 학교를 세웠다.
선교현장에서 그렇게 내놓고 자랑할 만한 기독교 대학이 별로 없다. 1907년에 장로교인에 의해 세워진 두마케티시(Dumaguete)에 있는 실리만 대학(Silliman University)교는 필리핀에서 내놓을 만한 대학이다. 207명의 교수진과 3,500명의 등록학생들을 가지고 있다.
실리만 대학은 현재 연합그리스도교회와 관계를 갖고 있는 에큐메니칼에 속한 대학교이다. 필리핀중앙대학(Centeral Philippine University)은 미국 침례교회와 관계가 있는데 1905년에 일루일루(Iloilo)에서 시작되었다. 1953년에 정부로부터 정식인가 받은 학위를 수여하는 대학으로 10개의 중소 대학교로 구성되었으며 한 개의
신학교를 가지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많은 선교 단체들이 일어났다. 이 선교단체들은 미개한 부족들에게 더많은 선교를 집중하고 있는 선교단체들이다. 남 침례교선교회는 1948년에 마닐라에 있는 전중국선교사들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 빠르게 성장하여 북쪽에 루손 섬과 남쪽에 민다나오섬 과 중앙에 시부섬에 현재 1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 했으며 이미 145 개의 교회를 개척하였고 그중 130개의 교회가 자립하고 있다. 세례교인이 13,000명에 이르고 있다.
해외선교사협의회(Over Missionary Fellowship)는 1952년에 민도로섬(Mindoro)에서 선교를 시작했으며 그 당시까지 거주하는 개신교 선교사가 하나도 없었다. 오늘날 선교사의 절반이 부족들이 사는 산간지역에 교회를 개척했다. 그 중에 약 30,000명에 이르는 망얀 (Mangyan)
지역에 사는 원시생활을 하고 있는 6개의 주요 부족들에 게 선교를 하고 있다. 문서선교를 통하여 필리핀 교회들에게 큰 공헌 을 하고 있는 선교 단체이다.
위클리프 성경번역(Wycliffe Bible Translators)선교회는 피트만 박 사(Dr. Richard Pittman)의 인솔로 22명의 성경번역자들이 1953년에 필리핀에서 도착함으로 시작되었다. 1970년에는 150명의 선교사들이 42부족들 가운데서 일했다. 성경의 부분들이 23개의 언어로 번역 되었다. 이방인 부족들도 관심을 가졌으며 모슬렘 족에게까지 사역이 확 대되었다. 번역자들은 직접전도를 하지 않았으나 현재 36부족 가운데 신앙인 들이 생겼다.
또한 필리핀의 원시 부족들 가운데 일하고 있는 새 부족선교회( New Tribes Mission)는 현재 6부족에 50명의 선교사를 파송 했다.
개신교의 전래와 발전
필리핀에서 개신교의 선교 역사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 보다 가장 늦은 1898년 부터 시작되었다.
이보다 앞선 1837년에는 국제 항구로 그 문이 열리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1838년과 1853년 두 차례에 걸쳐 영국 성공회는 1050 여권의 성경책과 100여권의 신약을 마닐라에 가져오기도 했다.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 역사는 1899년 미국 장로 교회에서 파송한 Dr.James B. Rodgers와 1900년에 들어온 5명의 여성 감리교 선교사들로 부터 시작된다.
장로교의 첫 노회 조직은 1903년 4명의 목사 선교사로 두마게티에서 설립되었다.
당시 마닐라 장로교 노회는 6개 정도의 교회가 있었을 뿐이다.
사역자가 필요한 입장에서 1904년은 필리핀 사람으로 최초 Monico Dstrella를 안수하였고 다음해 1905년에는 2명, 1096년과 1907년에 각각 1명을 안수하였다.
이러한 장로교의 발전은 1914년 미국 장로 교회 총회의 인준 아래 완전 자율적인 필리핀장로교 교단에서 "The Evangelical Church of the Philippines Islands"란 이름으로 새로이 조직되었다.
필리핀의 개신 교회는 크게 둘로 구분되어 있다.
그것은 50년도 이전에 이미 자리를 잡은 개신교 교단과 그 이후에 들어온 교단들이다.
1901년에는 필리핀에서 연합 운동(The Evangelical Union)이 시작되었는데 이 운동은 Rogers 선교사의 연합 사역의 기반으로 그 소속 선교부인 장로교 선교부가 다른 교단 선교부 선교사들을 회의에 초빙함으로 시작된 것이다.
1914년 10월에는 미국인 회중으로 되어진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Union Church of Manila"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교단들의 치리회의 성격 차이로 인하여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1929년에 이르러 중국과 일본의 모델과 같은 범 국가적 교회 연합체를 만들게 되었다.
이는 당시 국제 YMCA와 국제 선교사 협의회의 총무로 있던 John R. Mott 박사의 필리핀 방문으로 가속화 되었다.
이 모임은 이전의 The Evangelical Union을 자연스럽게 무산시키고, 새로운 연합 단체가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연합의 방법, 연합 혹은 병합의 노력을 연구하고 개발하고 복돋기 위하여,또한 회원 교회의 공동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한 공동사역을 개발하기 위하여
The National Christian Council Of the Philippines이 탄생되었다.
1946년에는 장로 교회와 감리 교회가 연합하여 "The United Church of Christ in the Philippines" (UCCP)가 기초를 확고히 하여 1948년에 결실을 맺었다.
1950년대 이후에 이르러 개신교 선교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구 선교사들이 중국의 새로운 종교 정책인 "삼자운동"으로 말미암아 중국에서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고 선교지가 가깝고 영어권인 필리핀으로 대거 이동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 새로 들어온 선교사들은 이전에 개척되어 연합 운동 가운데 자라온 필리핀 교회들과 잘 어울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선교를 독자적으로 수행하였다.
대표적인 교단은 Far Eastern Gospel Crusade(1945), Overseas Crusades, The Southern Baptist Covention(1948), The Lutheran Church Missouri Synod (1946),
Wycliffe Bible Translators (1953),
Baptist General Conference,
Conservative Baptist Foreign Mission Society(1955),New Tribes Mission(1962),
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1952)가 일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에 이어 Christian Allegiance of Churches and Missionary, Free Methodist Church등이 새로 들어와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국 선교부는 1979년에 장로교 선교부를 세우기 시작하여 현 98년에 이르러는 대략 40여개의 선교부가 정부에 등록하였고 약 500여명 정도 사역하고 있다.
이러한 복음 주의적 선교 단체의 활동이 복음 전파에 힘을 쓰는 가운데 카톨릭은 필리핀 사회의 방향을 잡아가는 리더로 그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리고 개신교는 현재 꾸준히 교회의 성장을 거듭해 가고 있으며,
2000년까지 모든 마을에 한 개의 교회 세우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개신교 선교의 장애물
국민의 83%가 로마 천주교 신자로 400년 이상 카톨릭이 국민의 정신적인 면을 지배해 왔었다. 따라서 교회와 사회와의 간격이 크지 않다.
스페인 통치는 이러한 면을 구조적으로 융화시킨 장본인이다.
미국의 영향으로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현재까지도 교회는 시장 및 학교 인간의 삶과 밀접한 그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종전에 믿고 있던 토속 신앙의 알맹이는 변하지 않고 외형을 변화시킨 민속 카톨릭이 되어 가고 있다. 토속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카톨릭은 기존의 세력으로서
개신교를 박해하고 있다.
카톨릭이 개신교 선교사들의 사역을 방해하는 사례들은 수도 없이 많이 있다.
로마 카톨릭이 필리피노의 정신적인 면을 지배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매우미신적이다.
예를 들면.....
- 아픈 사람이 병원으로 가던 중 검은 고양이를 만나면 그는 죽게 된다.
- 꿈에 이빨이 뽑히면 그의 가족 중 하나가 죽게 된다.
- 밤에 신 과일을 먹으면 그의 부모가 일찍 죽게 된다.
- 책을 깔고 앉으면 멍청이가 된다.
- 창문을 통해 돈을 지불하면 가난해진다.
- 아침 일찍 창문을 열면 은혜가 온다.
- 귀가 큰 사람은 오래 산다.
- 아이가 유아 세례식 때 울면 오래 산다.
이외에도 많은 미신들을 그들의 삶 가운데서 접할 수 있으며 그 내용들은 우리 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미신들과 비슷한 것들도 많음을 보게된다.
또한 모슬렘 교도들의 테러 행위 역시 선교의 큰 장애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모슬렘들은, 특히 민다나오에서 자주 테러를 일으키므로 활발하게 움직이는 선교를 멈추게 하는 일들이 종종 있다.
주로 사람을 납치하여 돈을 요구하는 일들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
민다나오의 지역 특성 및 종교 상황
민다나오 섬은 필리핀의 7천여 개가 넘는 섬들 중 두 번째로 큰 섬이다.
중심도시는 DAVAO 인데 1996년 8월 APEC 회의를 개최할 만큼 아시아 지역에서는 생소하지 않는 곳이다. 통계 자료마다 다소 차이는 있으나 그들의 자료를 토대로 보면 그 면적은 우리 나라의 면적과 거의 비슷한 94,596 SQKm이다
필리핀 최남단에 위치하여 마닐라의 루손섬이 화산과 지진의 피해로 인해 원주민들의 생활이 많이 위협을 받고 있는 반면 민다나오는 매우 안전한 곳이다.
기후적인 면에서는 열대성 기후로 몬순 지대에 위치하여 높은 강우량과 계절풍의 영향으로 숱한 재난을 겪고 있는 루손섬에 비해 기후 역시 안정적이고 원주민들의 삶이 위협을 당할 정도는 아니다.
이곳에는 전체 인구의 10%를 차지하고 있는 27개의 부족이 살고 있는데,17개의 부족은 원주민이고, 약 10개의 부족은 무슬렘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 민다나오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모슬렘의 세력이 가장 강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곳 인구의 29.44%가 모슬렘으로 어느 지역을 가든지 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들 모슬렘들은 14-15세기에 힘으로 들어온 스페인에 쫓기어 지금까지 사회의 소외층이 되어 그들의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이 모슬렘들은 필리핀 전체 인구의 8%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곳의 22개의 중요 도시와 지역들 중에 6개가 인구 중에 50% 이상이 모슬렘들이다.
필리핀 북부의 바기오 지역을 제외하고 좀처럼 산을 볼 수 없는 필리핀에서 민다나오의 Apo산은 가히 장엄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Apo산의 지류 산들에는 모슬렘에게 쫓겨 산으로 거주지를 옮긴 사람들과 원주민들이 주로 살고 있는 곳이다.
모슬렘들은 그들이 민다나오로 쫓겨올 때 기존의 종교들을 멸절하거나 모슬렘으로 전향을 강요하면서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장악해 갔다.
그래서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부족이나 종족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삶의 터전을 옮긴 경우도 있고 모슬렘들의 횡포에 이기지 못하고 떠나온 경우도 있다.
때문에 모슬렘의 세력이 약하거나 그들의 세력권 안이라도 은밀하게 그들의 신앙을 지키면서 그들의 신앙을 이끌어 줄 사역자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을 흔히 만날 수 있다
이들의 국민성이 과격하지 않기 때문에 선교사들이 사역하기에는 큰 어려움은 없겠으나 복음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서는 모슬렘의 세력권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참으로 불가피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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