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후회들보다 더 구속적인
More Redemptive Than Your Regrets = God’s Redemptive Grace > Your Regrets =
내가 (Kyle Idleman 목사) 아내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지만 다음 주일 설교에 대한 생각 때문에 잠이 들지 못하고 있었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천정을 보고 있었고 아내는 잠이 들어 있었다. 갑자기 세면장 쪽에서 우장창 요란한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큰 거울이 떨어져 왕창 깨진 것이다. 거울이 떨어진 세면장 문에는 커다란 구멍이 드러나 있다. 어찌 된 구멍인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것은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 때문이다. 내가 그 때 좀 더 인내하고 온유한 남편이었어야 했다. 겸손하고 절제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해서 생긴 구멍이다.
그 일 후에 나는 내 아내가 그것을 잊어버리길 또 내 아이들이 그걸 발견 못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 구명을 가리려고 거울을 거기에 걸었던 것이다.
아마 거울을 매달고 있던 고리가 힘이 약해서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면 생각해보면 내가 설교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도전하여 그들의 후회를 처리하게 하려는 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설교 전에 먼저 내가 가진 후회(가책)를 흑암에서 치료하시는 은혜의 광명으로 불러내시기 위하여 그 거울을 확 치셔서 깨어지게 하셔서 나로 하여금 그 일을 상기케 하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나는 세면장에 서서 그 구멍을 보고 바닥에 박살이 난 유리조각들을 보았다. 그 깨진 조각들에서 나 자신의 반성을 볼 수 있었다. 허리를 굽혀 유리조각들을 줍기 시작했다. 그 유리조각들에서 나 자신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I couldn’t help but see myself in the pieces.) 이전으로 돌아가 그것을 다르게 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나는 영원히 미친 남편, 주먹으로 문에다 구멍을 내는 남편으로 남을 것이다.
그 굉음이 아내를 깨웠고 그녀가 와서 내가 무릎을 꿇고 유리조각들을 줍는 것을 보았다. 나는 별로 우는 사람이 아니지만 울고 있었고 아내는 내가 그 거울에 특별히 애착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내가 그전에 그 일이 벌어졌을 때 아내에게 미안한다고 말했는지 확실치 않으나 나는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아내와 하나님께 그 때 그 일을 인하여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내는 내게 다가왔고 나는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울었다. 아내의 손길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 짓을 덮거나 혼자 간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한 짓 때문에 후회와 회개를 하는 것이 나를 어떤 은혜를 받아들이는 위치에 두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유리조각들을 다 모았다.
후회 對 수치
Regret vs. Shame
우리가 은혜를 잃고 죄책감을 갖고 살 때 그 죄책감은 보통 후회와 수치감으로 표면으로 올라온다. 후회와 수치감은 함께 갈 수 있고 자주 그런다. 그것들은 상호적으로 배타적이다. 그러나 후회와 수치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단순히 말하자면 후회는 당신이 갖고 있거나 혹은 갖고 있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해 나쁘게 느끼는 느낌이다. 반면에 수치심은 당신 존재에 대해서 (about who you are) 혹은 당신이 하나님과 타인들에 의하여 어떻게 인지되는가에 대해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에 대해 느끼는 나쁜 느낌이다. (about how you think you’re perceived by God and others) 수치심은 당신의 정체성에 더 연결되어있는 반면 후회는 당신이 행한 혹은 행하지 않은 특별한 어떤 것에 대한 쪽으로 기우러진다.
나는 감옥에 갇혀있는 많은 죄수들이 후회의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밤에도 짊어지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신 것을 알테지만 그들의 생각에 그렇게 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은 어떤 것을 했을 때 끊임없이 특별한 순간을 다시 체험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과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값을 물리는 것에 의해 쇠진하고 있다. 한 수감자는 내게 말했다. “나는 용서받은 것을 압니다만 내가 과거로 되돌아가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면 내 인생이 얼마나 다르게 되었을까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후회이다.
나는 사람들이 그들의 후회에 대해 내게 말할 때 전형적으로 “내가 그럴 수만 있다면 ...” (if only I ...) 이란 말로 문장을 시작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근래에 “비밀 후회들”이라고 불리는 인터넷 사이트를 우연히 알았는데 그 사이트는 그들이 저지른 어떤 것 때문에 후회를 표현하는 사람들로부터 온 수 만개의 우편물들을 열거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어떤 후회들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과거로 돌아가서 무엇들인가 다르게 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타임머신 기능을 갖추게 하시면 그것이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려는가? 아마도 당신은 첫 번째 술을 마시기 바로 전으로 되돌아 가려고 할지 모른다. 혹은 당신의 가정에서 걸어나가기 직전으로 되돌아 가고 싶을지 모른다. 혹은 당신의 이전 남자 친구의 페이스북 요청을 받아들이기 직전으로 되돌아 가고 싶을지 모른다. 혹은 당신이 첫 데이트에 나가기로 동의하기 바로 직전으로, 혹은 당신이 낙태 의원으로 걸어들어가기 바로 직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을 것이다.
당신은 빗장 뒤에 갇혀있지는 않을 테지만 그것은 당신이 죄수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 대부분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죄책감과 후회들로부터 자유롭기를 간절히 구하다.
후회, 양심의 가책, 그리고 회개
Regret, Remorse, and Repentance
성경은 두 제자들이 자기들이 그럴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한 어떤 것을 저지른 한 밤에 대하여 말한다. 예수께서 체포되신 날이었고 두 사람은 가룟 유다와 시몬 베드로였다.
예수님을 그 밤에 배신한 사람은 유다만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이미 예고하셨었다. “바로 오늘 밤 당신들이 다 나 때문에 넘어질 것이오. (마 26:31). 베드로가 이 말씀을 듣고 무슨 말을 했는가? 그는 열정적으로 반대했으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참으로 말하오. 이 밤에 닭이 울기 전에 베드로, 당신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오.“ (34절) 베드로는 자기의 약속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제가 당신과 함께 죽더라도 저는 결코 당신을 부인하지 않겠소.” (35절)
만찬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기도하라고 당부하시고 혼자 더 가셨다. 그분은 자기를 기다리는 공포를 아시고 밤의 고요함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으셨다.
유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장소를 알고 예수님을 체포할 600명을 이끌고 거기에 도착했다. 어두운 밤 누가 예수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신호를 정했는데 자기가 입맞추는 자가 예수라고 알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호하려는 열정으로 단검을 한 사람에게 휘둘렀는데 그의 목이라도 찌르려 했을 것이나 그 사람의 귀만 베어 떨어뜨렸다. 예수께서는 시몬을 나무라시고 그 사람의 귀를 붙여 고쳐주셨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이 다 도망갔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뒤따라갔다. 대제사장의 뜰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서 모닥불을 쬐고 있었는데 시몬 베드로는 거기에 끼어들었다. 그때 한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예수의 추종자들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부인한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다른 곳에 갔는데 거기서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예수의 제자라고 하니 또 부인하고 또 다른 자리로 옮겼다. 거기서도 한 여종이 그를 알아보자 지옥의 형벌을 걸고 자기는 아니라고 맹세한다. 바로 그 때 예수께서 뜰을 통과하여 끌려가시면서 베드로를 쳐다보셨고 마침 그 순간 닭이 울었다. 눅 22:62은,
그 순간 주님이 그를 향하여 몸을 돌리시고 바라보셨다. 갑자기 주님 의 말씀이 섬광처럼 스치면서 베드로는 그 뜰을 떠났고 비통하게 울었다. (62절)
예수님에 대한 불법적이고 정당치 않은 소송이 진행될 때 유다는 양심의 가책이 막심했고 후회로 가득 찼다. 그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가서 그가 받은 돈을 던지고 말했다. “무죄한 분을 배신했으니 범죄했다.” (마 27:4)
베드로나 유다나 모두 그들이 한 짓에 대하여 죄책감과 후회로 가득했다. 그들이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서 잘못할 것들을 행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그들은 그럴 수 없다. 당신은 결코 안 할 거라고 스스로 약속한 한 가지를 행했다. 그리고 그것은 행해지지 않을 수 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었다면). 아마 당신은 그것을 한 번 행했을지 모른다. 아마 당신은 세 번 행했는지 모른다. 아마 당신은 얼마나 많이 했는지 그 흔적을 잃어버렸을 수 있다. 지금 그때가 이 3일처럼, 혹은 두 어시간처럼 느껴진다. 혹은 단지 2~3초가 당신 인생의 나머지를 규정할지 모른다.
우리의 후회들은 가책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죄를 직면할 때 올바른 반응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당신을 거기에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자주 당신을 찾아내는 장소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우리의 죄책감을 곧바로 대하게 될 때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피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자주한다.
여기에 사람들이 그들의 후회들을 다룰 때 공통적인 방법들이 있다.
1. 합리화 (Rationalization). 내가 듣는 공통적인 합리화들의 어떤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나는 누군가를 상처주고 있지 않다”, “나는 내가 느끼는 방식으로 도울 수가 없다”, “하나님이 나를 이런 방식으로 만드
셨다”, “하나님은 내가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당신이 그런 사람들이 무엇인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때도 자신에게 무언가가 잘 되고 있다고 스스로를 확신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이 느끼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합리화하고
있는 때가 언제인지를 당신은 항상 알 수 있다.
2. 정당화 (Justification). 이것은 보통으로 자신 외에 어떤 것, 어떤 사람을 탓하는 형식을 취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
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고 그래서 그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온갖 방법으로 설명함으로써 후회를 다룬다. “만일 내 부모님
들이 그렇게 허용적이 아니었더라면, 내 부모님들이 그렇게 엄격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내 아내가 그렇게 비판적이지
않았더라면, 만일 내 남편이 그렇게 부주의하지 않았더라면, 만일 내 대표가 그렇게 불공정하지 않았더라면, 그 문화거 그렇게 부패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식으로 후회를 다룬다.
3. 상대화 (비교, Comparisons). 제1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을 남에게 비교함으로써 그들
의 후회들에 대해서는 더 나은 것으로 느끼게 만들려고 한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사람들이 가십 잡지들과 (gossip
magazines) 배우가 아닌 사람들의 실생활을 다루는 TV를 (reality TV) 좋아하는 이유들 중의 하나이다. 어느 것도 우리
가 행한 것이 다른 사람들이 행한 것에 대해 듣는 것처럼 그리 중대사가 아니라고 느끼게 만들 수 없다. 그것은 아무튼
우리의 후회를 덜어주는데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 말이다. “최소한 내가 ~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괜챦쟎아.”
4. 기분 전환용 오락 (Distraction). 이것은 큰 문제다. 우리는 거울 앞에서 자신을 너무 오래 바라보기를 결코 중단하지 않
는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결정들을 깊이 반성하는 시간을 결코 갖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의 아주 짧은 시간들
을 일, 인간관계들, 연예(오락)들로 채운다. 만일 우리가 2~3초 갖게 된다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재빨이 꺼내
서 오락을 하거나 인테넷 사이트를 두루 훓는다.
5. 도피 (Escapism). 이것은 기분전환용 오락의 노골적인 형식이다. 사람은 그들이 느끼는 후회를 다룰 수 없어서 몇 알
의 각성제들을 왕창 맞고 마리화나를 피우고, 술에 취하고, 신용카드를 꺼내어 흥청망청 쇼핑으로 향한다. 우리는 우리
의 죄책감을 다루기를 애쓰면서 자신이 약을 투여하고 우리가 행한 것의 고통을 마비시킨다. 비록 잠간 동안이더라도.
베드로와 유다는 둘 다 그들의 과오들을 시인한다. 그들은 그들이 잘못 간 곳을 인정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후회들이 그들을 양심의 가책으로 이끌어 가게 허용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후회를 다르게 처리한다. 유다는 배신의 대가로 받은 삼십 개를 돌려준다. 그가 일들을 바로 잡으려고 애쓴 것은 좋다. 가능한 한,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가진 많은 후회들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주 작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후회없이 살면서 이런 힘든 때를 보내는 아주 의미깊은 이유들 중의 하나일 경향이 있다. 유다는 그가 해버린 것을 원상태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그런 것들을 해결할 수 없거나 깨진 조각들을 도로 모을 수 없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그가 나가서 자살했다고 말해준다 (마 27:5).
유다는 그의 후회들을 처리할 수 없었다. 그는 그의 후회들이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보다 더 크다고 확신되어졌다. 그는 그가 저지른 것의 무게와 함께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자살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살이란 수단으로 자기들의 후회들을 처리하지는 않을테지만 나는 많은 사람들이 서서히 후회로 자신드을 죽이고 있다고 확신되어진다.
베드로는 유다처럼 후회로 가득찼지만 그는 회개한다. 후회는 양심의 가책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은 회개로 나아가야 한다. 이 문제 속으로 너무 많이 읽기를 원치 않으나 내 마음에서 베드로와 유다 모두 다 가책으로 채워졌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만이 울었다고 읽는다. 성경의 메시지 (Message) 버전은 눅 22:62를 이같이 풀이한다. “그는 나가서 울고,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아마 이것이 내 관심을 붙잡는 이유는 나는 회개의 표식으로서 눈물을 찾기를 배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게 와서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묻는 질문들 중의 하나이다. “당신은 그것에 대해 울어본 적이 있나요?” 아마 그것은 이상한 질문같이 보일지 모르나 내 경험으로는 눈물이야말로 우리의 후회들을 처리하기 위해 그것이 올 때 가히 믿기 어려울 정도의 치료능력을 가질 수 있다. (in my experience tears can have incredible healing power when it comes to dealing with our regrets)
죤 크리쏘트톰 (John Chrysostom) 은 그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죄의 불길은 강하지만 그것은 소량의 눈물에 의해 꺼진다. 왜냐하면 눈물은 우리 과오들의 화로에 불을 끄고 죄악의 상처들을 깨끗케 하기 때문이다.” (the fire of sin is intense, but it is put out by a small amount of tears, for the tear puts out a furnace of faults and cleans our wounds of sins).
고후 7:10은 유다와 베드로가 자기들의 후회들을 처리하는 방식 사이에 가능한 차이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주시는 슬픔은 구원으로 가는 회개를 가져오고 후회를 남기지 않으나 세상이 주는 슬픔은 죽음을 가져온다. (Godly sorrow brings repentance that leads to salvation and leaves no regret, but worldly sorrow brings death.)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이후 어떤 이른 아침에 베드로는 다른 몇 제자들과 함께 고기잡으러 밖에 있었다. 고기 잡는 일은 예수님을 온 시간을 바쳐 따르기 이전에 그의 생계수단이었다. 그가 모든 것을 떠나 따른 그분을 부인한 후에 실패처럼 느끼면서 그의 본업으로 돌아간 듯하다. 아마도 그는 그의 죄를 회개했고 용서받았으나 후회를 가지고 그의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게 몰렸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었으며 또 만일 하나님이 무언가를 해주신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그를 사용하실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베드로는 배 안에서 약 70미터 떨어진 해변가에서 걷는 긴 물체를 보았다. 해변의 그 사람이 배를 향해서 외쳤다. ”무언가 좀 잡았소?“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대답했다. “전혀 아무 것도 못 잡았어요.” 그 사람은 말했다. “배 반대쪽으로 그물을 던지시오.” 제자들은 그대로 했고 그들의 그물들이 고기로 가득찼다. (요 21:4-6을 보시라).
베드로는 그 사람이 예수신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배가 해변으로 가는 것을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물로 뛰어 들어 그분에게 헤엄쳐 갔다. 예수께서는 아침을 요리하고 계셨고 그들은 숯불 둘레에 모였다. 분명한 냄새가 어떻게 기억을 불러올 수 있는지 눈여겨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 숯불의 냄새가 그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 모닥불 주변에 자기가 서있었던 마지막 때를 생각나게 하지 않았는가 싶다. 그들이 그 불을 둘러 서 있을 때 세 번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오?” 세 번 그는 예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을 단언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치시오.” (15-17절).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그의 후회들에 갇혀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여전히 베드로를 위한 큰 계획을 갖고 계시다. 은혜는 후회를 구속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란 트로피
A Tophy of God’s Grace
우리 부부가 깨진 유리 조각들을 주웠던 그 아침 나는 내 아내에게 하나님이 나로 문에 구멍을 내고 그것을 거울로 가렸던 내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나누기를 원하시는 듯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아내에게 그 질문에 오케이인가를 물었다. 나는 그 이야기가 그녀에게 당황스런 것일 거라고 깨달았다. 그녀는 수 천의 성도들이 그녀가 벽장문에 주먹으로 구멍을 내는 놈팽이와 결혼했다고 알기를 원치 않을 수 있었다. 나는 비밀히 그녀가 아니라고 말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이 이해하실 것이고 그 갈고리를 내게서 벗어주실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말했다. “나를 믿어요. 우리만이 문에 구멍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 겁니다.”
그 주말에 나는 후회를 갖고 사는 삶과 회개를 하고 사는 삶 사이에 있는 차이점에 대해 말하고 그래서 우리가 은혜로 자유로워질 수 있게 말하려고 강단에 섰다. 나는 솔직해졌고 온 교회에 그들의 설교자가 성질을 못 이겨 문에 주먹으로 구멍을 냈다고 말했다. 예배가 끝났을 때 나는 우리 교회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내게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가 접근할 때 나는 눈길을 떨어뜨렸다. 나는 당황했고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와서 나를 얼싸안고 말했다. “아무도 이것을 모르는데요 내 침실의 그림 뒤에는 구멍이 있어요.” 우리는 2, 3 분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 얘기가 끝나는 시간에 얼굴을 들어 보니 내게 말을 하려고 기다리는 다섯 명 이상의 남자들을 보게 되었다. 당신은 그들이 내게 무엇을 말하기를 원하는지를 추측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아내가 벽장 문에 구멍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만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녀가 은유적으로 말했다고 추정했으나 그 주일 모든 예배 후에 나는 은유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의 구멍에 대해 내게 말하려고 줄을 선 남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만일 당신이 오늘 내 집에 와서 내 벽장(사람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벽장)으로 걸어 들어간다면 당신은 여전히 그 문의 구멍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그 문을 교체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거울로 그것을 가리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노출되게 놔두기로 작정했다. 내가 숨기고 싶었던 그 문의 구멍은 내가 후회하는 것을 내게 상기시키고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상기시키기 시작했다. 부숴진 벽장문은 하나님의 은혜의 트로피가 되었다.
은혜가 내 벽장문의 구멍보다 더 크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가 후회하고 가책을 받으면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게 만드는 내 약점, 내 죄악보다 더 크다. Grace is greater than a hole in my closet d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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